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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이야기/세례명 이야기

니콜라오(Nicholas) 2.(7) - 12월 6일

 

니콜라오(Nicholas)

 

7. 12월 6일 성인 니콜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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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니콜라오(12월 6일)

 

신분 : 주교

활동지역 : 미라(Myra)

활동연도 : 270?-341년경

같은이름 : 니고나오, 니콜라스, 니꼴라오, 니꼴라우스, 니콜라우스

 

소아시아 리키아(Lycia) 지방의 항구 도시인 파타라(Patara ; 오늘날 지중해 연안 튀르키예 남서부 지역에 해당)에서 태어난 성 니콜라오의 생애에 대해 정확한 역사적 기록은 거의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전설과 비공식 전기 등을 통해 그의 뛰어난 행적으로 인해 교회 안팎에서 오래전부터 큰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파타라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막대한 재산을 유산으로 물려받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자선과 죄인들의 회개를 위한 활동에 헌신하였으며 가난한 이들을 더 적극적으로 돕기 위해 사제가 될 생각을 하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성 니콜라오가 사제품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미라(Myra, 오늘날 튀르키예의 뎀레 Demre)의 주교가 선종하였고 주교들이 후임자를 찾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자 어느 날 밤, “내일 아침 성당에 맨 먼저 들어오는 ‘니콜라우스’라는 자를 뽑아라.”라는 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왔습니다. 성 니콜라오는 다음날 아침 성당에 기도를 하러 왔다가 영문도 모른 채 주교로 축성됩니다. 얼마 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가 시작되자 그는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고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313년 신앙의 자유가 선포되면서 10여 년의 옥고에서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 재건과 이교도들의 개종을 위해 본격적으로 노력하였고 당시 성행하던 아리우스(Arius) 이단에 대항하여 325년 제1차 니케아(Nicaea) 공의회에도 참석했다고 합니다. 미라의 주교로서 그는 뛰어난 성덕을 바탕으로 교구 내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 활동에 전념하였으며 동시에 놀라운 기적을 통하여 가난하고 억울한 이들을 구해 주었습니다.

 

성 니콜라오의 선행과 기적에 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는데 가난 때문에 어떤 아버지가 세 딸의 결혼 지참금을 마련하지 못하여 출가시키지 못하고 매춘부로 넘겨야 할 곤경에 처했을 때의 일이 이중 가장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성 니콜라오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 몰래 창문으로 그때마다 금이 든 자루를 넣어 주어 세 자매가 마침내 모두 정당하게 혼인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또한 기근이 든 어느 해에 아이 셋을 살해한 고약한 푸주한이 아이들을 소금에 절여 먹거리로 팔려고 할 때, 이들 세 어린이를 성 니콜라오가 구해 소생시킨 일도 있었습니다. 어느 해에는 많은 이들이 기근으로 굶주리고 있었는데 미라 해안으로 식량을 가득 실은 여러 척의 배가 폭풍우에 밀려 떠밀려왔는데 각 배의 선장에게 그는 얼마간의 식량을 기증해 달라고 간청하여 굶주리는 이들에게 나눠주었는데 출항 후에 선원들이 식량을 살펴보니 이전과 비교해서 그 양이 전혀 줄지 않았음을 발견하고 놀라워한 일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성 니콜라오는 다른 사람의 죄를 뒤집어쓰고 억울하게 사형에 처한 청년 세 명을 구해주었고, 모함을 받아 위기에 처한 고관들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꿈에 나타나서 구해준 일도 있었으며 물에 빠진 선원들을 기적적으로 여러 번 구해주기도 하였습니다.

 

 

이렇듯 생전에 소외되고 불쌍한 처지에 놓여 있던 많은 이들을 도와준 성 니콜라우스 주교가 341년경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 뒤에도 그의 명성은 전 서방으로 더 멀리 퍼져나갔으며 그의 전구로 많은 기적도 일어났습니다. 그가 주교이던 미라에 있던 그의 유해는 이 도시가 아랍의 침략을 받자 미라의 주교좌성당에서 이탈리아의 바리(Bari)로 1087년 5월 9일 이탈리아 상인들이 옮겨와 그곳에 경당을 세우고 그곳에 모셨습니다. 이곳은 많은 이들, 특히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이 찾아와 점차 유럽 최대의 순례지가 되었고 유해가 이장된 그 해에 바로 대성당 건축에 들어가 1197년 110년간의 건축 기간을 거쳐 성 니콜라우스 대성당을 완성하였고 교황 우르바누스 2세(Urbanus II)가 축성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바리의 성 니콜라오’로도 불리게 되었습니다. 성 니콜라우스 주교는 그의 행적과 여러 기적으로 어린이와 누명 쓴 죄수, 항해사, 폭풍우에 갇힌 뱃사람, 어부, 여행자 등 다양한 계층 사람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부터 성탄절 때 성 니콜라오가 어린이들에게 자선과 사랑을 기리는 뜻에서 그의 이름으로 선물을 주는 관습이 시작되었고 이로 인해 성 니콜라오는 네덜란드에서는 ‘신터 클레스’(Sinter Claes), 영어권에서는 ‘산타 클로스’(Santa Claus)로 불렸는데 성 니콜라오의 축일 행사가 중세 후기 유럽 전역에서 성대히 거행되면서, 성 니콜라오는 처음으로 독일에서 산타클로스로 탈바꿈하게 되었습니다. 산타클로스의 붉은색 옷 역시 주교가 입는 빨간색 복장에서 유래한 것이며 성 니콜라오는 현대에 와서 산타클로스로서 대중적으로 더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는 미국에 네덜란드계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이 정착하면서, 어린이들에게 성 니콜라우스 축일에 선물을 나눠주는 관습을 소개하면서 성탄 전야 행사와 이를 함께 하면서부터입니다. 성 니콜라오는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어린이와 가난한 이들의 수호성인으로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으며 그리스와 시칠리아, 러시아, 풀리아(Puglia), 로렌(Lorraine) 등 여러 지방과 나라의 수호성인으로 매우 큰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성 니콜라오는 그의 행적이나 기적과 관련해서 교회 미술에서도 보통 주교관을 쓰고 지팡이를 든 채 세 개의 황금 구슬이 놓인 성경을 한 손에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무죄한 세 사람을 구하는 장면이나 세 아이를 소생시키거나 선원들을 기적적으로 구하는 모습 역시 화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주제입니다. 옛 “로마 순교록”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꿈에 나타나 도움을 간청한 이들을 구한 기적을 전하며 12월 6일 목록에서 리키아 지방 미라의 주교인 성 니콜라오를 언급하였고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미라의 주교인 성 니콜라오를 같은 날 목록에서 성덕과 하느님 은총의 전구자로서 유명하다고 소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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