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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이야기/세례명 이야기

보나벤투라(Bonaventure) 2.(3-5) - 6월 10일, 7월 15일, 10월 26일

 

보나벤투라(Bonaventure)

 

3. 6월 10일 복자 보나벤투라

신분 : 추기경

활동지역 : 페라가(Peraga)

활동연도 : +1386년

같은이름 : 보나벤뚜라, 보나벤처

 

파도바(Padova)의 명문가 출신으로 페라가에서 태어난 보나벤투라 바두아리오(Bonaventura Baduario)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회의 첫 회원으로 꼽힙니다. 그는 젊어서 아우구스티누스 회원이 되어 파리 대학교를 마쳤고 교황 인노켄티우스 6세(Innocentius VI)가 볼로냐(Bologna) 대학교에 신학원을 설립했을 때 초대원장을 지냈습니다. 교수직을 수행하면서도 그는 수많은 논문과 주해서를 저술하였는데 특히 세속적인 문학에도 관심이 높았습니다. 시인 페르라르크와 매우 가가운 친구 사이였던 그는 그의 장례식 때에 설교를 맡기도 하였고 1377년에는 총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그다음 해에 성녀 체칠리아의 추기경이 되었습니다. 뛰어난 교회 옹호자였던 그는 바티칸을 방문하기 위해 티베르 강을 건너던 중 화살을 맞고 살해당하였습니다.

 

4. 7월 15일 성인 보나벤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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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보나벤투라(7월 15일)

 

신분 : 추기경, 신학자, 교회학자

활동연도 : 1217?-1274년

같은이름 : 보나벤뚜라, 보나벤처

 

성 보나벤투라(Bonaventura)는 아버지 조반니 디 피단차와 어머니 마리아 디 리텔로(리텔라)의 아들로 조반니 디 피단차(Giovanni di Fidanza)라는 이름으로 바뇨레조에서 태어났습니다. 불확실한 전설이긴 하지만 그의 이름인 보나벤투라는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로부터 받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 자신의 설명에 의하면 어렸을 때 중병에 걸린 그가 거의 죽게 되었는데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에게 어머니가 중재 기도를 바쳐 기적적으로 치유되었다고 하며 이로 인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1238년에 작은 형제회 수도자가 된 그는 영국의 유명한 헤일스의 알렉산데르 문하에서 공부하기 위해 파리(Paris)로 갔고 그의 총애를 받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1248-1255년까지 파리 대학교에서 신학과 성서를 가르쳤던 그의 강의는 새로운 탁발 수도자를 반대하던 교수들로 인해 중단되고 말았는데 이로 인해 그는 생 아무르의 빌리암을 비롯한 반대자들의 공격에 대항하여 탁발 수도회를 옹호하는 논쟁에 뛰어들었고 “마지막 시대의 환난”과 “그리스도의 가난에 관하여”라는 저서를 남겼습니다. 마침내 교황 알렉산데르 4세가 1256년에 생-아무르를 단죄하고 탁발 수도회에 대한 공격을 중단시켰습니다. 파리에서 탁발 수도회가 다시 부흥될 때 성 토마스 데 아퀴노(Thomas de Aquino, 1월 28일)와 함께 그는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와 비슷한 초창기에 작은 형제회의 총장으로 피선된 성 보나벤투라는 수도회의 내부 분쟁자들을 화해시키는 일을 하였고 온건한 정책을 추구하여 극단주의 그룹을 단죄하였습니다. 나르본(Narbonne)에서 1260년 열린 수도회의 총회에서 그는 회칙에 대한 회헌을 선포하였는데 이는 오랫동안 수도회에 깊은 영향을 주게 됩니다. 1265년 요크의 대주교좌를 거절하한 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Gregorius X)의 선출을 1271년에는 적극 지지하였고 1273년 알바노(Albano)의 교구장 추기경이 되었으며, 그다음 해에는 로마(Roma)와 동방 교회의 일치를 토의하려는 리옹(Lyon) 공의회의 의사일정을 짜도록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그를 위촉하였습니다. 그러나 매우 불행하게 공의회가 열리고 있는 회기 중에 리옹에서 7월 15일에 운명하고 말았습니다.

 

중세 시대의 가장 뛰어난 철학자이자 신학자이며 사상가 중 한 분이며 ‘세라핌 박사’로도 알려진 보나벤투라는 수많은 글을 썼고 또 남겼는데 이중 영성 서적인 “베드로 롬바르드의 금언에 대한 주석”,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전기”, “세 갈래 길”, “완덕 생활”, “하느님께 가는 영혼의 여정” 등을 비롯하여 성서 주석, 약 5백 편의 설교 등이 유명합니다. 그는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 IV)에 의해 1482년 4월 14일 시성되었고 교황 식스투스 5세(Sixtus V)로부터 1588년 교회학자로 선포되었습니다. 그의 상징은 성체와 성합 그리고 추기경 모자입니다.

 

5. 10월 26일 복자 보나벤투라

신분 : 수사

활동지역 : 포텐차(Potenza)

활동연도 : 1651-1711년

같은이름 : 보나벤뚜라, 보나벤처

 

이탈리아 나폴리(Napoli)의 포텐차 출신인 보나벤투라(Bonaventura)는 노체라(Nocera)에서 콘벤투알 프란치스코 회원이 되었습니다. 순종적인 덕행으로 유명한 그는 장상직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수련장직은 맡았습니다. 성모님께 대한 보나벤투라의 신심은 원죄 없이 잉태하신 성모 신심이었으며 그는 라벨로에서 운명하였고 ‘순종의 모델’ 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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