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리오 (Gregory) 라는 세례명은 총 28분이나 계시는데 각각 어떤 분이신지와 그 의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레고리오 (Gregory)
같은이름 그레고리, 그레고리우스
17. 12월 19일 성인 그레고리오
신분 : 주교
활동지역 : 오세르(Auxerre
활동연도 : 455년 - 540년
성 그레고리우스는 프랑스 오세르의 제12대 주교로 13년간 교구를 돌보았습니다.
18. 12월 24일 성인 그레고리오
신분 : 신부, 순교자
활동지역 : 스폴레토(Spoleto)
활동연도 : +304년경
성 그레고리우스 신부는 막시미아누스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무차별 학살할 때에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신전에 희생, 제물 바치기를 거절하였는데 그들 중에서도 가장 용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군인들이 그를 법정에 연행하여 심문하였는데 "너희 하느님은 누구냐?"라는 질문을 받자 "당신 모상대로 우리를 창조하시고, 전능하시고 불사불멸하시며, 우리의 행업에 따라 상벌을 주시는 분이십니다."라고 대답하였고 이 대답 때문에 설독죄로 판정되어 불에 태워 죽이기로 하였으나 갑자기 지진이 일어났고, 다음날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습니다.
19. 1월 10일 복자 그레고리오 10세 (Gregory X)
신분 : 교황
활동연도 : 1210년-1276년
테오발도 비스콘티는 피아첸차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파리와 리에주에서 교회법을 공부한 후 리에주에서 부제가 되었는데 그는 1265년 오토보노 추기경을 수행하여 영국 선교 길에 오른 적도 있고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기도 하였습니다. 1271년 9월 1일 아직 사제품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교황 클레멘스 4세의 서거 이후 3년간 계속된 교황좌의 공석 끝에 6명의 추기경 위원회에 의해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며 선출 당시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던 그는 비테르보에 도착해 1972년 3월 19일 사제품을 받고 3월 27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그레고리우스 10세 교황으로 축성되었습니다.
그는 1274년 제2차 리옹 공의회를 소집하여 동방 교회와 로마 간의 화합을 꾀했으나 십자군 출정으로 말미암아 성공하지 못하였고, 공의회에서 다룬 주요 의제 가운데 교황 선거와 관련된 교령이 반포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교황의 서거 후 새 교황 선거를 위해 추기경들이 폐쇄된 공간에 들어가 선거가 끝날 때까지 머물러야만 하는 오늘날 교황 선거 방법의 토대를 제도화하였습니다. 공의회가 끝난 후 그는 스위스의 로잔 이탈리아의 밀라노, 피렌체, 아레초 등을 방문하다가 열병으로 쓰러져 1276년 1월 10일 아레초에서 선종, 주교좌성당에 묻혔습니다.
1713년 교황 클레멘스 11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교황 베네딕투스 14세에 의해 로마 순교록에 이름이 추가되었습니다.
20. 9월 3일 성인 그레고리오 1세(대) (Gregory Ⅰthe Great)
신분 : 교황, 교회학자
활동연도 : 540?-604년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는 이미 두 명의 교황(성 펠릭스 3세(9월 22일), 성 아가피투스(9월 20일)를 배출한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인 이탈리아 로마의 부유한 원로원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로마에서 법학 등의 고등 교육을 받고 573년 로마 시장이 되었습니다. 574년 경 아버지 고르디아누스가 세상을 떠나자 로마 첼리오 언덕에 있는 부모의 저택을 성 베네딕투스의 규율을 따르는 성 안드레아 수도원으로 만들고, 그 수도원에 입회하여 오래던부터 꿈꿔왔던 수도생활을 시작합니다.
또한 시칠리아에 있는 가족 소유의 토지에도 5개의 수도원을 더 세웠으며 578년 교황 베네딕투스 1세에게 부제품을 받고 579년 교황 펠라기우스 2세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의 교황 대사로 파견됩니다.
586년 경 로마로 돌아온 그는 다시 성 안드레아 수도원에서 수도원에서 수도생활을 계속하며 교황 펠라기우스 2세를 도와 교회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합니다.
590년 교활 펠라기우스 2세가 선종하자 수도자로서는 처음으로 만장일치로 제64대 교황에 선출되어 전염병이 로마를 휩쓸고 있던 시기에 출중한 행정 능력과 깊은 신앙심으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으며 교회 법령을 정비하고 무능한 성직자들을 해임하며 사제와 주교들의 영적 쇄신을 강조하고 막대한 경비를 들여 기아와 전염병으로 시달리는 시민들을 구호하기 위한 자선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지혜롭게 교황청 재산을 관리하고 랑고바르드족으로부터 포로들을 석방시켰으며 부당한 박해를 받던 유다인들을 보호하였습니다.
그는 중세 교황권의 창시자로 평가될 정도로 활동적인 교황이었는데 593년 랑고바르드족이 로마를 침공하겠다고 위협했을 때 직접 랑고바르드족과 담판을 지어 로마의 평화를 지켜냈으며 이로써 랑고바르드족의 왕과 함께 평화의 수호자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는 위대한 주교이자 유능한 정치적 감각의 소유자였으며 그의 학덕은 누구도 넘볼 수 있을 정도로 높았고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중세 주교와 사제가 꼭 읽어야 하는 교과서와도 같은 '사목 지침서', '욥의 윤리' 등 각종 성경 해설집과 설교집, 당시의 신학, 전례, 역사, 사회학의 풍부한 자료를 제공해주는 800여 통의 서한을 모은 '서간집', '그레고리우스 전례서' 등을 집필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교회의 성가를 재조정하고 그레고리우스 성가도 제정하여 '그레고리안 성가'의 편집자로 추앙받고 있으며 성인들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자 하였던 그는 총 4권의 '이탈리아 교부들의 생활과 기적에 관한 대화집'을 저술하였는데 제2권에서 누르시아의 성 베네딕투스(7월 11일)의 생애를 다루었습니다. 이러한 방대한 저서에 담긴 그의 사상은 서방교회의 신학과 전례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유럽의 역사에도 큰 발자국을 남겼습니다.
그는 게르만족의 개종뿐만 아니라 영국 앵글로색슨족의 개종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수도원장으로 재임할 때 로마 시내에서 영국에서 온 포로들이 노예로 팔리는 것을 보고는 그들에 대한 연민과 관심을 품게 되어 교황이 된 후 597년에 성 안드레아 수도원의 원장인 성 아우구스티누스(5월 27일)와 40여 명의 수도자를 영국의 켄트 왕국에 파견했고, 601년에는 영국에 요크 대교구와 캔터베리 대교구와 12개의 소속 교구를 설정하였습니다.
그는 교황권이 교회의 최고 권위임을 재확립하는 동시에, 교황을 일컫는 칭호인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란 표현을 처음 사용함으로써 교황권이 지배의 특권이 아니라 봉사하는 특권임을 분명히 했고 베네딕토 수도회를 면속시켜 교황의 권위 아래 두었습니다. 라틴교부의 일원이자 서방교회의 전통적인 4대 교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그는 중세 교황권의 창시자로 평가되고 있으며 고대에서 중세로의 전환기의 다양한 활동과 영성적 위대함으로 인해 ‘대교황’이란 명칭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604년 3월 12일 로마에서 선종한 그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장되었고, 사후 즉시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축일은 선종한 날인 3월 12일에 지내오다가 1969년 전례 개혁과 함께 그가 교황으로 착좌한 9월 3일로 옮겨 기념하고 있습니다.
교회 미술에서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는 교황의 전통적 상징인 예복과 삼중관을 쓰고 있고, 방대한 저서와 그레고리안 성가를 상징하는 책이나 악보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며 그의 귓가에 비둘기가 주로 그려지는데, 이는 그가 방대한 저작 활동을 할 때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그의 귓전에 머물며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하였습니다.
또한 성 그레고리우스의 미사를 주제로 한 작품도 많이 있는데, 이는 그가 미사를 집전하던 중 십자가 위의 고통의 그리스도께서 제대 위에 나타났다는 환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21. 2월 11일 그레고리오 2세 (Grerory Ⅱ)
신분 : 교황
활동연도 : +731년
성 그레고리우스는 669년 로마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젊어서부터 교회 일에 종사하며 두각을 나타내 차부제 때 이미 교황청 재정을 관리하였는데 성 세르기우스 1세(9월 8일) 교황 때에는 도서관장직을 맡는 등 주요 직책을 맡아 그의 학덕과 지혜가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 후 그는 710년 콘스탄티누스 교황을 수행하여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에게 행한 그의 대답으로 더욱 유명해졌으며, 이때 그는 황제로 하여금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715년 5월 19일에 그는 교황으로 선출되었는데, 그가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은 성직자들의 규율 정비와 이단 배척이었으며 사라센의 침략을 대비하여 로마 주변에 성곽 복원사업을 시작하였고, 교회와 병원 그리고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포함하여 수많은 수도원의 재건사업을 펼쳤습니다.
또한 독일 지역에 ‘독일의 사도’로 불리는 성 보니파티우스(6월 5일)를 파견해 큰 성공을 거두었고, 그를 주교로 서품하고 그의 선교 활동을 보호하기 위한 추천서를 써주기도 하였으며 이를 통해 황제가 교회에 간섭하지 않도록 조치하는 등 교황권 확립에도 큰 공을 남겼습니다.
727년에는 로마에서 교회회의를 소집하였고, 레오 3세 황제의 지원을 받던 성화상 공경 금지를 이단으로 단죄하였습니다.
22. 12월 10일 성인 그레고리오 3세 (Gregory Ⅲ)
신분 : 교황
활동연도 : +741년
시리아 사람 요한의 아들인 성 그레고리우스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 유능한 로마의 사제였습니다.
그의 학덕과 성덕이 너무나 유명해서 선임 교황인 성 그레고리우스 2세(2월 11일)의 장례식 도중에 환호하는 군중들의 갈채 속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며 선대 교황의 정책을 고수하면서 두 차례의 교회회의를 통하여 이단을 단죄하고, 성 보니파티우스(6월 5일)를 도와 독일 선교에 힘을 쏟았고 성 빌레발두스(7월 7일)까지 파견하는 열성을 보였고 성화상 파괴 운동에 저항하는 의도로 여러 성당을 장식하는 화려한 성상들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그는 성인들의 유해를 안치하기 위해 자신이 세운 구원자와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봉헌된 성 베드로 대성전의 소성당에 안장되었습니다.
23. 5월 25일 성인 그레고리오 7세 (Gregory Ⅶ)
신분 : 교황
활동연도 : 1022/1025-1085년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의 소바나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성 그레고리우스는 힐데브란트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어린 시절 로마로 가서 삼촌이 아빠스로 있던 아벤티노의 성 마리아 수도원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그는 라테라노 학교에서 지오반니 그라시아노의 문하생으로 공부하였는데, 그의 스승이 후일 그레고리우스 6세 교황(1045-1046년 재임)으로 선출되었을 때 교황 비서로 임명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1046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에 의해 그레고리우스 6세 교황이 폐위되었을 때 쾰른으로 갔다가 이듬해 교황이 선종한 후 성 오딜로(1월 1일)가 지도하던 클뤼니 수도원에 머물렀다는 말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으며 1049년 툴의 주교인 브루노가 성 레오 9세(4월 19일) 교황으로 등극하자 교황의 불림을 받고 로마로 가서 차부제품을 받고 교회의 재정과 성 바오로 수도원의 원장으로서 수도회 개혁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1054년에 그는 상스 교회회의를 주재하여 베렌가리우스를 단죄하였으며 니콜라우스 2세 교황 때에는 교황 칙서 발간 책임자로 일했습니다.
1073년 4월 21일 알렉산데르 2세 교황이 선종하자 그는 대중의 환호 속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었는데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축일에 그레고리우스 7세로 즉위하여 전임 교황들을 도와 자신이 추진해왔던 교회 개혁에 더욱 박차를 가했으며 성직매매의 죄를 들어 밀라노의 대주교를 면직하면서부터 교회 규율을 바로잡고 성직자의 생활을 쇄신하고자 하였고 1075년에는 전년도에 열린 로마 교회회의의 교령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평신도의 성직 임명을 금지하는 교령을 반포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1075년 3월에 공포한 교황령에서 교회와 교황이 국가와 국왕보다 우선한다고 천명하며 교황만이 온전히 주교 서임권을 갖고 있고, 황제를 폐위할 권한이 있다고 했으며 이는 결국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의 대립을 가져왔는데 평신도 성직 서임에 대한 금령은 실제 주교를 임명하던 황제에 대한 도전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인리히 4세 황제는 이에 저항해 공석인 밀라노 주교를 임명하는 등 제국 내에서 주교와 수도원장 서임권을 행사하며 교황과 충돌했는데 교황의 강력한 경고와 봉신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하인리히 4세는 결국 이탈리아의 카노사로 내려와 참회복을 입고 교황으로부터 파문 해제를 간청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성직 서임권 논쟁에서 승리하며 황제의 권한에 큰 타격을 주었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재임 기간에 복잡한 사건들도 많았으나 교회가 크게 부흥한 것 또한 사실인데 그는 흔히 ‘그레고리우스 개혁’으로 불리는 교회의 개혁 운동을 통해 교회의 자율성을 회복하고 교황권을 크게 확립한 교황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방 교회와 로마 교회 간의 일치에는 성공하지 못했으며 하인리히 4세 황제와의 대립으로 이탈리아 남부 살레르노까지 피신했다가 1085년 5월 25일 그곳에서 선종하였습니다.
교황 성 그레고리우스 7세는 1584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606년 교황 바오로 5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그레고리오(Gregory) 축일 1 (1-4) _ 1월 1일, 1월 2일, 1월 4일, 2월 27일
그레고리오(Gregory) 축일2 (5-10) _ 3월 9일, 4월 24일, 4월 26일, 5월 9일, 6월 18일, 8월 25일
그레고리오(Gregory) 축일3 (11-16) _ 9월 30일, 11월 17일, 11월 20일, 11월 23일, 11월 27일
그레고리오(Gregory) 축일5 (24-28) _ 7월20일, 3월 16일, 6월 18일, 5월 4일, 1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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