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젤라 (Angela)
1. 1월 4일 성녀 안젤라
신분 : 과부, 신비가
활동지역 : 폴리뇨(Foligno)
활동연도 : +1309년
같은이름 : 앤젤라, 엔젤라
성녀 안젤라에 대해서는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 지방 폴리뇨에서 1248년에 출생한 듯하고 좋은 가문에서 출생한 듯 하다는 정도밖에 알라진 바가 없습니다. 그녀는 어릴 때에는 세속적이었고 주의가 산만했다고 하며 처음에는 어느 부유한 사람과 결혼하였고 여러 자녀를 두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녀가 1285년경 참 빛의 환시를 보게 되고 이 환시는 세상의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을 알려주었으며 고통이 가득한 통로를 통한 완전한 사랑을 알려 주었습니다. 이에 갑작스럽게 그녀는 개심하게 되고, 회개 생활을 염원하던 중 성 프란치스코의 작은 형제회 제3회에 가입하게 되고 빛나는 신앙의 눈을 밝히게 됩니다.
'우나 베르지네 크리스티아나'란 단체를 이끌었던 그녀는 명상가였으며 수많은 환시를 보았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유ㅣ대한 신비가로도 알려져 있으며 작은 형제회의 쇄신 운동에도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사부 성 프란치스코를 열렬히 흠모하였음에도 성 프란치스코와는 아주 대조적인 성품이었다고 알려지고 있으며 활동적이었던 성 프란치스코에 비해 성녀 안젤라는 사변적이고 환시를 자주 보았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만물 속에서 하느님을 보았던 성 프란치스코와는 달리 성녀 안젤라는 하느님 안에서 만물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흐르는 원리는 단 하나 '행복한 사랑'이었으며 이것은 두 성인에게 동일하였습니다. 1693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12세에 의해 그녀에 대한 공경이 승인되었고, 교황 프란치스코는 교황의 권한으로 2013년 10월 11일 두 번째 기적 심사를 면제하면서 그녀에 대한 시성을 승인하였습니다.
2. 10월 2일 천사 안젤라
3. 1월 27일 성녀 안젤라 메리치(Angela Merici)
신분 : 동정녀, 3회원, 설립자
활동지역 : 브레시아(Brescia)
활동연도 : 1470/1474-1510년
같은이름 : 앤젤라, 엔젤라
성녀 안젤라 메리치는 이탈리아 북부의 가르다 호수 남쪽 데센자노에서 태어나 경건한 신앙인으로 교육을 받았습니다.
어려서부터 성인전을 즐겨 읽었고, 성인들의 금욕 생활에 감명을 받아 금욕을 하였다고 전해지며 13세 때 첫영성체를 한 후 평생 동안 동정을 지킬 것을 결심하였는데, 쌍둥이같이 자라던 15세의 언니와 브레시아 시민이라는 귀족 작위와 넓은 땅을 가진 영주였던 아버지 조반니와 어머니를 연달아 여의고 외삼촌의 보살핌을 받으며 5년간 휴양지로 유명한 살로에서 살게 됩니다.
그 후 성녀 안젤라는 작은 형제회 재속회(3회)에 입회하여 기도와 가난, 극기의 생활을 철저히 실천하며 자신을 이웃을 위한 속죄의 제물로 하느님께 봉헌하였으며 부모처럼 돌보아주던 외삼촌의 사망 후 고향 데센자노로 돌아온 성녀 안젤라는 이웃에게 봉사하며 살았는데, 특히 주위의 가난한 아이들을 모아 기도와 신앙생활을 지도하였습니다.
1516년 안젤라는 두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브레시아의 귀족 파텐골라 가족을 위로하러 브레시아에 갔다가 그들의 청으로 그곳에 머물게 되는데 이곳에서 성녀 안젤라는 죄인들의 영혼을 위하여 속죄와 금욕생활을 하는 한편 고향에서와 같이 청소년들에게 종교 교육을 실시합니다.
1524년에는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고, 다음 해 로마를 순례한 뒤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동정녀들의 모임을 시작하고자 하는 뜻이 있음을 밝히고 허가를 받아 브레시아로 돌아옵니다.
카알 5세와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1528년 브레시아가 점령당하자 크레모나로 피난을 간 그녀는 그곳에서 심한 병을 앓다가 다시 건강을 회복하며 1530년 전쟁이 끝나 브레시아로 돌아온 성녀 안젤라는 뜻을 같이 하는 12명의 동정녀들과 함께 이듬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룹니다.
그리고 1535년 11월 25일 28명의 동정녀들은 브레시아의 성 아프라 성당에서 영성체를 하고 성녀 안젤라가 만든 규칙에 따라 청빈, 정결, 순명을 지키는 회원이 될 것을 서명함으로써 '우르술라회'가 공식적으로 설립되었고, 1537년 성녀 안젤라가 초대 원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들은 특히 소녀들의 교육에 투신하고자 하였는데 가톨릭 여성 교육을 표방한 수녀회는 우르술라회가 첫 번째이며 초기에 그들은 가족을 떠나지 않고 자신들의 삶의 자리에서 수도복이 아닌 단순한 복장으로 환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직접 방문하여 그들에게 봉사하였습니다.
성녀 안젤라는 1540년 1월 27일 사망하여 성 아프라 성당에 묻혔고, 1768년 교황 클레멘스 8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807년 5월 24일 교황 비오 7세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4. 3월 2일 성녀 안젤라(십자가의) (Angela of the Cross)
신분 : 설립자, 수녀원장
활동연도 : 1846년-1932년
같은 이름 : 곤잘레스, 마리아 데 로스 안젤레스 게레로 곤살레스, 안젤리따, 안젤리타, 앙헬라, 앤젤라, 엔젤라
십자가의 성녀 안젤라는 1846년 1월 30일 에스퍄냐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중심지인 세비야에서 가난하지만 신심 깊은 가정의 딸로 태어나 천사들의 마리아 게레로 곤살레스(Maria of the Angels Guerrero Gonzalez)라는 이름으로 세례성사를 받습니다.
미래의 성녀인 그녀는 집안에서 안젤리타(Angelita)라는 애칭으로 불렸고 그녀의 아버지는 삼위일체 수도회에서 요리사로서 일했으며 어머니 역시 세탁실에서 일했습니다. 그들은 14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자녀는 6명뿐입니다. 안젤리타는 신심 깊은 부모의 가르침과 모범에 의해 큰 영향을 받았고 어린 나이부터 묵주기도 바치는 법을 배웠는데 그녀는 종종 어머니가 본당에서 제대를 정리하는 동안 동정 성모의 성화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으로 발견되곤 했습니다.
5월 성모 성월이 되면 그녀의 집에는 동정 성모께 바쳐진 간단한 제대가 차려졌고, 그녀의 가족들은 묵주기도를 암송하며 성모님께 특별한 시간을 봉헌하였으며 8살 때 첫 영성체를 하고 이듬해에 견진성사를 받습니다.
정규 교육을 조금밖에 받지 못한 그녀는 어린 소녀 때부터 신발가게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녀의 주인이자 신발 수선의 스승인 안토니아 말도나도 역시 신심이 깊은 여성이었는데 매일 종업원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고 성인들의 삶을 읽었습니다.
성당 참사회 회원인 세비야의 호세 토레스 파딜랴 신부는 안토니아의 영적 지도자로서 ‘성인을 만드는 분’이란 명성을 얻고 있었는데 안젤리타는 16살 때 토레스 신부를 만나 그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그 후 수도회에 들어가고 싶은 안젤리타의 소망은 커져갔고, 19살 때 산타크루스에 있는 맨발의 카르멜 수녀회에 입회하고자 했지만 병약한 몸 때문에 거절을 당했는데 대신 토레스 신부의 권고를 따라 당시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급속도로 번지고 있는 콜레라 전염병에 걸린 병자들을 돌보는 일을 시작합니다.
1868년 안젤리타는 세비야에 있는 애덕의 수녀회에 다시 한번 입회를 신청했고, 여전히 건강이 좋지는 않았지만 허락을 받아 입회하게 되는데 애덕의 수녀회 수녀들은 그녀의 건강을 위해 그녀를 쿠엥카와 발렌시아로 보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으며 결국 그녀는 수련기간 중에 다시 애덕의 수녀회를 나오게 되고 집으로 돌아가 신발가게에서 계속 일을 하게 됩니다.
토레스 신부는 안젤리타를 위한 하느님의 계획이 따로 있음을 믿고 있었지만 그 계획은 여전히 신비에 싸여 있었는데 안젤리타는 1871년 11월 1일 십자가 아래서 복음 전도자로서 일생을 살겠다는 개인적인 허원을 발하였고 1873년 환시를 통해 새로운 사명을 시작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녀는 기도 중에 예수님이 매달려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는 십자가가 똑바로 서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고, 즉시 하느님께서 그 빈 십자가에 자신이 매달리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가난한 이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 자신 또한 그들과 함께 가난하게 되기를 요구하고 계심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안젤리타는 토레스 신부의 뜻에 순명하며 신발가게에서 계속 일하면서 자유 시간에는 상세한 영적 일기를 쓰는데 시간을 쏟아부었는데 이는 하느님의 부르심대로 장차 그녀가 살아야 할 삶의 방법과 이념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며 1875년 8월 2일 세 명의 다른 여성들이 안젤리타와 합류합니다.
그들은 세비야에 집을 하나 빌려 함께 공동생활을 시작하는데 그날부터 그들은 밤낮으로 가난한 이들을 방문하고 돕기 시작하며 십자가의 안젤라라는 수도명을 얻은 안젤리타 원장수녀의 지도하에 십자가의 수녀회 수녀들은 가난한 이들 가운데 있지 않을 때는 확실히 세상을 떠나 관상 생활에 전념합니다.
그들은 집에 돌아와서도 기도와 침묵을 엄격히 지켰으나 밖으로 나갈 필요성이 있거나 가난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봐야 할 때는 항상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십자가의 안젤라 원장수녀는 다른 수녀들을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돕고 사랑하기 위해 온 천사처럼 보았습니다. 1877년 두 번째 십자가의 수녀회 공동체가 세비야 주의 우트레라에 설립되었고, 다음 해에 야야몬테에도 하나 더 설립되었지만 그 해에 토레스 신부가 선종하면서 호세 마리아 알바레스 신부가 수녀회의 두 번째 영적 지도신부로 임명됩니다.
십자가의 안젤라 원장수녀가 살아있는 동안 다른 23개의 수녀회 공동체가 설립되었고, 수녀들은 애덕과 가난과 겸손의 모범으로 모든 사람들을 돌보고 감화시켜 나갔는데 십자가의 안젤라 수녀는 모든 이들에게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로 알려졌습니다.
십자가의 안젤라 원장수녀는 1932년 3월 2일 세비야에서 선종하였고 1982년 11월 5일 세비야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3년 5월 4일 마드리드의 콜론 광장에서 100만여 명의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다른 네 명의 복자들과 함께 같은 교황에 의해 시성식을 갖고 성인으로 선포되었습니다.
그녀는 안젤라(앙헬라) 데 라 크루스또는 마리아 데 로스 안젤레스 게레로 곤살레스로도 불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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