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Peter)는 2020년 서울대교구 신자들의 세례명 중 가장 많이 사용하는 세례명 3위에 오른 굉장히 많은 세례명입니다.
이중 6월 29일이 축일인 베드로가 가장 대표적인 세례명이지만 다른 축일을 택하고 싶을 경우 다른 베드로들을 읽어보고 마음에 드는 다른 베드로 선택해도 괜찮습니다. 또한 국내 성인 중에서 선택하여 효주 아녜스나 대건 안드레아처럼 함께 사용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93. 9월 20일 성인 권득인 베드로 (權得仁 Peter)
신분 : 상인, 순교자
활동지역 : 한국
활동연도 : 1805-1839년
같은이름 : 베드로, 권베드로, 권 베드로,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서울 문안에서 태어난 성 권득인 베드로(Petrus)는 신자 집안의 후예로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16세가 되던 해에 어머니도 잃지만, 열심하던 어머니의 표양에 따라 착실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소규모의 장사를 하여 근근이 끼니를 이어 나가던 그였으나 친절과 신심만은 대단히 높았는데 그 후 결혼을 하여 사직골에 살면서 첫 닭 울 녘에 일어나 등잔불을 켜 놓고 날이 밝을 때까지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 후 너리골로 이사를 한 그는 십자가와 성패를 만들어 팔아 전교에 힘쓰면서 이를 생계의 방편으로 삼았습니다.
집을 찾아온 처남과 함께 이야기하던 1839년 1월 16일 저녁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갇히게 된 그는 부인과 처남이 배교하여 석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절불굴의 용기를 드러냈으며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포장이 “어찌하여 천주교를 믿느냐?” 하고 묻자 “천주는 천사와 사람과 만물의 임금이시오, 사람은 이러니 천주님께 감사할 생각을 두지 않는 것이 어찌 옳은 일이라 하겠습니까? 따라서 사람은 누구나 다 천주를 공경하고 섬길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화가 난 포장이 무섭게 매질하라고 명령하고, “네 동교인들을 대라” 하고 소리를 지르자 권 베드로는 “천주교에서는 남을 죽이거나 해하는 것을 엄금하니 어찌 감히 내 말로써 사람들에게 죽을 위험을 당하게 하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를 강제로라도 배교시키기 위하여 포장은 못된 죄수들에게 내맡겨 고문하게 하였는데 이 악한 죄수들이 베드로를 어찌나 매질하였는지 두 번이나 죽은 줄 알고 내버려 두기까지 하였습니다. 결국 사형선고를 받은 그는 1839년 5월 24일 금요일 서소문 밖에서 25세의 나이로 순교하였습니다.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1984년 5월 6일 시성되었습니다.
94. 9월 20일 성인 남경문 베드로 (南景文 Peter)
신분 : 회장, 순교자
활동지역 : 한국
활동연도 : 1796-1846년
같은이름 : 베드로, 남 베드로, 남베드로,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서울의 중인 계급 집안에서 태어난 성 남경문 베드로(Petrus)의 아버지는 1801년의 신유박해 전부터 천주교인이었으나, 세상을 일찍 떠나 그에게 신앙을 전해주지 못하였습니다. 20세 때에 병이 들어 대세를 받고 입교하게 된 그는 이때 그를 권고한 사람이 박 베드로였기 때문에 본인도 베드로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처음에 금위영의 병정 노릇을 하다가 후에는 조개젓 장사를 하였고 스물두 살 때에 허 바르바라(Barbara)와 혼인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교리를 자세히 몰라 비싼 이자를 받는 돈놀이를 하였으나, 그런 일은 교회가 금하는 것이라는 말을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신부로부터 듣고 대금업을 패하고 신부를 따라 공소 방문을 다녔는데 이러한 열성으로 새로 입국한 선교사들로부터 회장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기해박해 때에 포졸에게 잡힐 뻔하였으나 외교인 형제들의 도움으로 겨우 면하였으나 박해가 끝난 후 선교 신부와 신자들이 모두 순교하자 2, 3년 동안 스스로 타락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지난날을 뉘우친 그는 다시 열심한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고 친구들에게 “이런 죄를 범하였으니 천국에 가려면 순교를 해야 하네”라는 말을 자주 하였다고 하며 매일 아침 해가 돋기 전에 일어나 오랫동안 기도하고, 보속의 뜻으로 추운 겨울에도 불을 때지 않고 지냈다고 합니다.
천주교 신자임이 널리 알려진 남 베드로는 1846년의 병오박해가 일어나자마자 쉽게 체포되었는데 포졸들이 그를 끌고 가려고 하자 그의 아내가 팔에 매달려 “당신 없이 어떻게 살란 말이오?” 하며 붙잡으려 하였지만 “이제 다 틀렸소. 나는 이 이상 더 살 수 없소” 하고 그는 아내를 물리쳤습니다. 그가 포청 옥에 갇혀 있을 때 그를 만나려고 그의 형제 하나가 왔다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서 옷과 음식을 들여보내자 그는 “옥 안에서 얻어먹는 음식과 지금 입고 있는 옷도 내게는 과하니 다른 것을 더 가져올 필요는 없다”라고 전하게 합니다.
한 번은 문초 중에 포장에게 허리춤에서 군사의 패를 떼어 바치면서 “나는 천주께서 창조하신 물건으로 오늘까지 살아왔고 또 나라에서 쌀도 많이 받아먹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죽는 길밖에 없으니 군사의 패를 도로 바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포장이 “네가 배교만 한다면 살려 줄 뿐만 아니라 네 직업도 잃지 않게 해 주마.” 하고 약속하지만 베드로는 듣지 않았고 이에 포장의 명으로 곤장으로 때리는데 이는 너무도 혹독하여 어깨 위에서 곤장이 부러져나갑니다. 신자들을 고발하라고 관리가 재촉하자 그는 이미 죽은 사람 몇의 이름을 댈 뿐이었습니다. 형리들은 양 손목을 잡아매고 공중에 매달아 채찍으로 마구 갈겼는데 이런 매질을 이기지 못하고 남 베드로는 1846년 9월 20일, 그의 나이 40세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1984년 5월 6일 시성되었습니다.
95. 9월 20일 성인 모방 베드로(Maubant Peter)
신분 : 신부, 순교자
활동지역 : 한국
활동연도 : 1803-1839년
같은이름 : 나백다록,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로, 페르투스, 피에르, 피터
성 피에르 필리베르 모방(Pierre Philibert Maubant) 신부의 한국 성은 나(羅)씨이고, 이름은 세례명인 베드로(Petrus)를 한문으로 음차하여 백다록(伯多祿)이라고 하였습니다.
1803년 9월 20일 프랑스 칼바도스(Calvados) 지방의 바시(Vassy)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세계의 끝까지 가서 우상 숭배자들에게 포교를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그는 829년 5월 13일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선교사의 꿈을 꽃피우기 위하여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고 중국 사천(四川) 교구로 파견됩니다.
포교지로 가던 도중에 그는 조선의 초대 교구장인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를 만나게 되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주교와 동행하기를 희망하였으며 주교는 그의 경건함과 열성적인 면을 생각하여 기꺼이 조선의 선교사로 받아들입니다.
주교가 조선 입국을 목전에 두고 만주에서 선종하자, 그는 당시 주교를 영접하기 위하여 그곳에 와 있던 조선의 교우 5명을 만나 조선에 입국하기로 결정합니다.
천신만고 끝에 의주 변문을 통과하여 1836년 1월 12일 입국에 성공한 그는 처음으로 조선에 입국한 서양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모방 신부는 조선에 입국한 후 조선어를 배우는 한편 우선 한문으로 성사를 주기 시작하였으며 서울에서 시작하여 경기도와 충청도의 열여섯에서 열일곱 곳의 교우촌을 돌며 포교를 하여 그 해 12월까지는 어른 213명에게 세례를 주고, 600명 이상에게 고해성사를 주었습니다. 또한 가는 곳마다 회장들을 뽑아 주일과 축일에 교우들을 모았고 그 모임에서 공동으로 기도를 드리고 성인전기와 교리문답과 복음 성경들을 읽고 배우도록 지도하기도 하였습니다.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큰 관심을 두었던 모방 신부는 김대건 안드레아(Andreas), 최양업 토마스(Thomas), 최방제 프란치스코(Franciscus) 등 세 소년을 택해 라틴어를 가르치고 성직자에게 필요한 덕행을 가르쳤으며 당시의 상황에서 조선 내에서의 교육이 불가능하였기에 이들을 1836년 12월 2일에 ‘마카오’로 보내어 정식으로 신학을 배우도록 하였습니다.
샤스탕(Chastan, 鄭) 신부가 이듬해 1월 15일 조선에 입국하자 모방 신부는 곧 양평 지방으로 내려가 전교하는 동시에 다시 조선어를 배워 조선어로 성사를 주기 시작하였지만 이미 몸이 쇠약해져 있었고 결국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 포교를 하던 중 열병에 걸리게 되고 곧 서울로 옮겨져 치료를 받습니다. 그러나 이미 절망적인 상태였기에 샤스탕 신부로부터 병자성사를 받고 3개월 후에 겨우 회복됩니다.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가 1837년 말 조선에 입국하자, 1839년까지의 선교사들의 활동은 그 어느 때보다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기해년에 조정에서는 다시 천주교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는데 이에 선교사들도 그 대상에 오르게 되었고 앵베르 주교의 권유로 자수한 그는 홍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됩니다. 그리고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를 당하여 그의 나이 35세인 9월 21일 순교하였습니다.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1984년 5월 6일 시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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