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종교 이야기/세례명 이야기

베드로(Peter) 축일 18.(84-86) _ 5월 29일(국내)

 

118명이나 계신 베드로(Peter) 2020년 서울대교구 신자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세례명 3위로 6월 29일이 축일인 베드로를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세례명을 베드로로 결정했지만 6월 29일 말고 다른 축일을 택하고 싶은 경우 여러 베드로를 읽어본 후 마음에 드는 다른 베드로 세례명 중에서 선택해도 괜찮고 국내에도 많이 있어서 효주 아녜스나 대건 안드레아처럼 이름과 세례명을 함께 사용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84. 5월 29일 복자 송 베드로 (宋 Peter)

5월29일이-축일인-송베드로
송 베드로(5월 29일)

신분 : 양반, 순교자

활동지역 : 한국(Korea)

활동연도 : 1821-1867년

같은이름 : 송베드로,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충청도 충주 서촌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송(宋) 베드로(Petrus)는 어려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우면서 신앙생활을 하였고 장성한 뒤에는 부친인 송 베네딕토를 모시면서 성 가정을 이끌어 나가는 데 열중하였습니다. 부친인 송 베네딕토와 함께 가족을 데리고 진천 배티 교우촌으로 이주하여 신앙생활을 하던 송 베드로는 그러던 중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이듬해 봄에는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러 다니던 한양 포졸들이 배티로 들이닥치게 됩니다.

 

포졸들은 배티로 몰려와 그곳에 거주하던 송 베드로의 가족 모두를 체포하여 진천 관아로 압송하였으며 그 후 경기도의 죽산 관아로 끌고 가서 가두었고 그 후 다시 한양으로 이송하였는데, 이때 체포된 사람들은 송 베드로와 그의 부친인 송 베네딕토, 그리고 그의 딸과 며느리인 이 안나, 이 안나의 아이 등 모두 5명이었습니다.

 

송 베드로는 1867년, 그의 나이 46세에 한양으로 압송된 뒤에 신앙을 굳게 지킨 다음 순교합니다.

 

송 베드로는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가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하였을 때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2014년 8월 16일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습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의 축일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기념하고 있습니다.

 

 

85. 5월 29일 복자 신태보 베드로 (申太甫 Peter) 

5월29일이-축일인-신태보-베드로
신태보 베드로(5월 29일)

신분 : 순교자

활동지역 : 한국(Korea)

활동연도 : 1769?-1839년

같은이름 : 신 베드로, 신베드로,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신태보(申太甫) 베드로(Petrus)는 경기도의 용인 근처에서 태어나 1795년 무렵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집안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없지만, 뒷날의 행적으로 미루어볼 때 그는 교육을 통해 어느 정도의 학식을 습득했던 것으로 생각되며 전주에서 1840년 순교한 최조이 바르바라가 그의 며느리입니다.

 

신 베드로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되고 10년이 지난 후 사촌인 이여진 요한과 함께 입교하였고 일찍부터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만나 성사를 받고자 하였으나 워낙 비밀리에 활동하던 주 야고보 신부를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가 끝나고 용인에 거주하던 순교자의 가족등과 강원도로 이주해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살던 신 베드로는 사촌 이 요한과 다른 교우들과 연락이 닿게 되자, 그들과 함께 교회 재건 운동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합니다.

 

교우들이 당시에 가장 시급하게 생각한 것은 북경에서 다시 성직자를 영입해 오는 일이었고 그 결과, 이 요한이 교우 한 명과 함께 1811년 말에 북경으로 가서 신자들의 서한 두 통을 전하게 됩니다.

 

조선 신자들의 성직자 영입 운동은 오랫동안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신 베드로는 그때마다 이를 위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신자들의 희망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이에 영혼을 구하는 일에 힘쓰기로 작정한 신 베드로는 여러 지역을 전전하며 생활하다가 경상도 상주의 잣골에 정착하여 은둔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는 그동안 교회 서적을 필사하여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곤 합니다.

 

1827년 전라도에서 정해박해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이 살던 곳에서 이 소식을 듣게 된 신 베드로는 가족과 함께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전주에서 파견된 포졸들과 상주의 포졸들이 잣골로 들이닥쳤는데 이미 체포된 신자들을 통해 그가 교회 서적을 필사하여 나누어준 사실과 그의 거주지를 알고 있었던 포졸들은 신 베드로를 전주로 압송하였고 신 제드로는 전주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는데, 이러한 내용은 훗날 그 자신이 성 샤스탕(St. J. Chastan, 鄭) 신부의 명에 따라 기록한 ‘옥중 수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중 다음의 내용은, 신앙을 지켜내기 위해서 그가 얼마나 혹독한 형벌을 받았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내 다리는 살이 헤어져서 뼈가 드러나 보였으며, 앉을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내 상처는 곪아서 참을 수 없는 악취를 풍겼다. 더욱이 내 방은 벌레와 이 투성이었으므로, 아무도 내게 근접할 용기를 내지 못하였다. 다행히 건강한 몇몇 교우들이 부축을 해 주어 몸을 좀 움직일 수가 있었는데, 그들은 가끔 내 방을 치워 주기도 하였다. 이 애덕의 행위를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이렇게 형벌을 당하면서도 결코 교회 서적과 동료들이 있는 곳을 밀고하지 않은 신 베드로는 관장이 배교를 강요하면 “천주교가 없이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욕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감사는 신 베드로를 할 수 없이 다른 신자들과 함께 옥에 가두었고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하여야 했던 그는 때때로 마음이 약해지기도 하였지만 용맹한 신앙심으로 늘 이를 극복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난 뒤에, 임금의 명으로 전주 장터(숲정이)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는데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이었고 그의 나이는 70세가량이었습니다.

 

신태보 베드로는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가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하였을 때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2014년 8월 16일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습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의 축일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기념하고 있습니다.

 

 

86. 5월 29일 복자 원시장 베드로(元-- Peter)

신분 : 양인, 순교자

활동지역 : 한국(Korea)

활동연도 : 1732-1793년

같은이름 : 원 베드로, 원베드로,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1732년 충청도 홍주 응정리(현, 충남 당진군 합덕읍 성동리)의 양인(良人) 집안에서 태어난 원(元)시장 베드로(Petrus)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몇 해 후인 1788-1789년 무렵, 56-57세가 되었는데 사촌 형이었던 원시보 야고보와 함께 천주교 교리에 대해 듣고 입교하게 되고, ‘시장’은 그의 관명(冠名)입니다.

 

어느 날 집을 떠나 1년 이상 다른 지방에 가서 생활하면서 교리를 공부한 원 베드로는 ‘천주교 신앙이 수천 년 동안 목숨을 보전해 주는 약’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이후에는 집으로 돌아와 친구들과 친척들에게 천주교의 주요 교리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설명에 하느님의 은총이 힘을 보태 주었고, 친구들과 친척들은 마음이 움직여 하느님을 믿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이때까지도 그는 세례를 받지 못하였었습니다.

 

원 베드로의 본디 성격은 사납고 야성적이어서 '호랑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는데 신앙을 실천하면서 성격이 변해 어떠한 일에서나 온화함을 보여 주었고 가난한 이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고 이웃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키는 데 열중하였기에 그의 이름은 관장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관장은 포졸들에게 원 베드로와 원 야고보를 체포해 오도록 명하는데 이때 사촌인 원 야고보는 친구들의 권고로 다른 곳으로 피신하여 있었으나 원 베드로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홍주 관아로 끌려가게 됩니다.

홍주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가 문초를 받게 된 그는 관장의 어떠한 강요에도 굴복하지 않았으며 “천주를 배반하거나 동료들을 밀고할 수 없으며, 교회 서적이 있는 곳도 말할 수 없다.”라고 답변하였습니다. 화가 난 관장은 형리들에게 주리를 틀고, 치도곤 70대를 치게 하였지만 그럼에도 원 베드로는 하느님과 부모님께 대한 본분과 천주교의 참된 도리에 대해 설명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옥에 여러 달을 갇혀 있으면서 자주 끌려 나가 배교를 강요당하고 형벌을 받았지만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그는 포졸과 형리들에게 전교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며 그러던 어느 날 그를 만나러 한 교우가 옥으로 찾아왔고, 원 베드로는 이때 그에게 세례를 받을 수 있게 됩니다.

 

감사에게 홍주 관장은 모든 사실을 보고하였고 ‘원시장을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받게 되고 이에 관장은 원 베드로를 다시 옥에서 끌어내 갖은 형벌을 가하지만 그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기에 마지막으로 관장은 원 베드로를 기다리는 가족들이 있었기에 혈육의 정에 호소해 보기로 하였는데 그는 자식들 이야기를 듣고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자식들에 대한 이야기는 제 마음을 크게 움직입니다. 그러나 천주께서 친히 저를 부르시니, 어찌 그 목소리에 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사건을 빨리 마무리 짓고자 한 홍주 관장은 관례에 따라 사형수에게 마지막으로 주는 음식을 가져다주고 죽을 때까지 매질을 하도록 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고 그러자 다른 방법을 생각한 끝에 관장은 그의 몸에 물을 부은 후 밖으로 내다 놓아 얼어 죽게 하라고 명합니다.

 

원시장 베드로가 덮어쓴 물은 이내 얼음으로 변하였는데도 그는 오로지 주님의 수난만을 생각하였고 그러다 마지막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면서 하느님께 자신의 목숨을 하느님에게 바치는데 1793년 1월 28일(음력 1792년 12월 17일)로, 그의 나이 61세였습니다.

 

신태보 베드로는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가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하였을 때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2014년 8월 16일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습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의 축일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기념하고 있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