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Peter)
서울대교구에서 조사한 신자 세례명 3위 세례명인 베드로(Peter)는 6월 29일 축일인 베드로를 가장 많이 사용하시지만 다른 축일을 원하실 경우 다른 축일을 선택하셔도 무방합니다.
베드로(Peter) 축일 1. _ 6월 29일, 2월 22일
74. 1월 8일 성인 베드로 토마스 (Peter Thomas)
신분 : 주교
활동연도 : 1305-1366년
같은이름 :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프랑스 남서부 가스코뉴(Gascogne)의 브레이유(Breil)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성 베드로 토마스(Petrus Thomas)는 성당도 없는 곳에서 태어났지만, 카르멜회와 연관을 맺게 되고 능력을 인정받아 콩돔(Condom)에서 수련을 시작하게 됩니다. 1342년 카르멜회의 총경리가 된 그는 이 직책 때문에 아비뇽(Avignon)으로 가게 되는데 당시의 그곳은 교황이 머무는 곳이라 그의 성덕이 고위성직자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설교에도 매우 뛰어났던 성 베드로 토마스(Petrus Thomas)는 교황 클레멘스 6세(Clemens VI)의 장례식에서 강론하도록 초청받기도 하였으며 제노바(Genova), 밀라노(Milano), 베네치아(Venezia)의 교황대사로 힘든 정치적 문제들을 원만히 타결하는 수완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성 베드로는 1354년에 파티(Patti)와 리파리(Lipari), 1359년에 코론(Coron), 1363년에 칸디아(Candia)의 대주교가 되었으며 1364년에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의 명의 총대주교가 되었습니다.
교황 우르바누스 5세(Urbanus V)를 위해 세르비아와 헝가리, 콘스탄티노플을 여행하면서 투르크족에 대항할 십자군을 조직한 그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를 공격하는 원정대에 참가하여 1365년 화살을 맞고 심한 부상을 당하게 되고 3개월 뒤인 1366년 1월 6일인 주님 공현 대축일에 키프로스(Cyprus) 파마구스타(Famagusta)의 카르멜회 수도원에서 운명하였습니다. 그에 대한 공경은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해 1609년 승인되었고, 교황 우르바누스 8세에 의해 카르멜회 안에서 1월 8일에 축일을 기념하도록 1628년 결정되었습니다.
75. 8월 1일 성인 베드로 파브르(Peter Faber)
신분 : 신부
활동연도 : 1506-1546년
같은이름 :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파버, 파베르, 페이버
1506년 4월 13일 사부아(Savoie, 프랑스 동남부에서 이탈리아 서북부에 이르는 지방의 옛 이름) 지방의 빌라레(Villaret)라는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성 베드로 파브르(Petrus Faber)는 어려서 주중에는 아버지의 양들을 돌보고 주일에는 성당에서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면서 자연스럽게 성소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이는 학업에 대한 열정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톤(Thones)에서 한 사제의 보살핌을 받다가 후에 인근 학교에 들어가게 된 그는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그는 파리(Paris)로 갈 결심을 하게 되는데 1525년 부모의 동의를 얻어 파리 대학에 입학하게 되는데 여기서 그는 학업에 대한 소망을 이루게 되고 뜻밖에도 자신의 참된 성소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후에 파리의 기숙사에서 나바라(Navarra) 출신의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우스(Frianciscus Xaverius, 12월 3일)와 같은 방을 쓰게 되는데 그들은 진심으로 서로를 아꼈으며 1530년의 같은 날 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게 됩니다. 그리고 후에 이 대학에서 예수회를 설립한 로욜라(Loyola)의 성 이냐시오(Ignatius, 7월 31일)를 만나 그의 첫 번째 동료가 됩니다.
성 이냐시오의 영적 지도를 받으며 사제직에 대한 성소를 확인하게 된 그는 1534년 5월 30일 사제품을 받고, 같은 해 8월 15일 몽마르트르(Montmartre) 수도원의 순교자 성당에서 성 이냐시오와 그의 초기 여섯 동료 중 하나로 개인적인 서원을 하게 되는데 가난과 정결, 그리고 학업이 끝나는 대로 예루살렘으로 가서 이교들의 회개를 위해 일생을 봉헌한다는 서원을 합니다. 이때 그는 사제로서 동료들을 위해 미사를 집전하였습니다.
성 이냐시오가 건강상의 이유로 536년 잠시 에스파냐로 귀국하면서 자신을 대신하여 그에게 동료들을 이끌도록 하였고 1536년 11월 15일 동료들과 함께 파리를 떠난 그는 이듬해 1월 베네치아(Venezia)에서 성 이냐시오와 재회합니다.
성지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전 그들은 교황의 특별한 축복을 받기 위해 성 베드로 파브르를 로마에 파견하였지만 터키인들의 방해로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이 어려워지자 성 이냐시오와 동료들은 베네치아에서 1537년 6월 24일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그해 겨울 그는 성 이냐시오와 동행해 교황을 만나기 위해 로마로 가게 되는데 이때 로마 근교의 한 성당에서 성 이냐시오는 환시를 체험하게 되는데 이는 예수회 설립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예수회의 초기 동료들 중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 중 한 명이었던 성 베드로 파브르는 깊은 지식과 온화한 성덕으로 많은 존경을 받았고 많은 영혼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는 로마에서 사피엔티아(Sapientia) 대학의 교수로 활동하다가 1539년 교황의 명으로 파르마(Parma)로 파견되어 사제들의 양성에 힘썼으며 1540년 여름에는 다시 독일의 보름스(Worms)에서 개최되던 종교회의에 파견되었습니다. 당시 보름스에는 루터파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성 베드로 파브르는 토론과 설교를 통하여 가톨릭의 입장을 수호하고 독일 교회가 가톨릭 신앙을 지키도록 격려하였습니다.
독일의 여러 도시를 돌며 급속히 성장하는 프로테스탄트에 맞섰으며 가톨릭교회가 직면하였던 어려움의 원인을 분석하였던 그는 교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직자들의 생활과 신앙이 쇄신되어야 함을 깨달아 성직자와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영신수련을 지도하며 많은 도움을 주었고, 스스로도 복음적 가난과 영성적 삶의 실천을 하여 많은 이들을 가톨릭 신앙으로 되돌아오도록 하였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성소의 씨앗을 심어주어 젊은이들이 스스로 성소를 발견하도록 인도하였습니다.
그는 독일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1544년 8월에는 독일을 떠나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로 파견되는데 포르투갈의 리스본(Lisbon)과 에스파냐의 바야돌리드(Valladolid)에서도 그는 예수회원으로서 열정적으로 활동하였고 에스파냐의 주요 도시들을 도보로 여행하며 신앙의 열정과 성소를 불러일으키고 육성하였으며 트리엔트(Trent) 공의회 중에는 교황의 신학자문으로도 임명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과로와 고된 여행으로 극도로 쇠약해져 1546년 7월 17일 로마에 도착해 지병이던 열병으로 고생하던 중 8월 1일 40세의 나이로 성 이냐시오의 품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이미 성인처럼 존경받고 있었던 그는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1872년 9월 5일 시복 되었고, 프란치스코(Franciscus) 교황에 의해 2013년 12월 17일 성인으로 선포되었습니다.
성 베드로 파브르는 기적 심사와 시성식 없이 ‘균등한 시성’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는데 이는 이미 교회 안에서 성인처럼 공경해온 이들을 시성하는 특별 규정으로 교황이 지속적인 공경을 공식적으로 확인함으로써 모든 절차를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성 바오로 파브르의 축일을 예수회에서는 8월 2일에 기념합니다.
76. 12월 6일 성인 베드로 파스카시오(Peter Paschasius)
신분 : 대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 톨레도(Tolodo)
활동연도 : +1300년
같은이름 : 베드로,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어릴 때부터 프랑스 나르본(Narbonne)의 사제이며 파리(Paris)의 신학박사를 가정교사로 모시고 교육을 받은 성 베드로 파스카시우스(Petrus Paschasius, 또는 베드로 파스카시오)는 가정교사와 함께 파리로 가서 학업을 마치고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그 후 에스파냐 발렌시아(Valencia)로 돌아온 그는 24세의 나이로 사제로 서품 되었으며 아라곤(Aragun)의 제임스 1세가 아들인 산초의 가정교사로 임명할 때까지 바르셀로나(Barcelona)에서 신학을 가르쳤으며 그 후 톨레도(Toledo)의 대주교로 임명되었습니다.
아직도 무어인들이 점령하고 있던 지역의 주교가 된 그는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포로들을 속량하고 겁에 질려 떠는 신자들을 격려하였으며 이교인과 배교자들을 상대로 복음을 선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즈음 무어인들에게 체포되어 그라나다(Granada)의 지하 감옥에 갇힌 그는 옥중에서도 쉬지 않고 이슬람을 반대하는 글을 쓰다가 73세의 나이로 기도하던 중에 살해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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