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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이야기/세례명 이야기

베드로(Peter) 축일 13.(65-68) _ 1월 10일, 8월 2일, 2월 8일, 12월 21일

 

베드로(Peter)

 

베드로(Peter) 서울대교구에서 조사한 신자들의 세례명 중 3번째로 많은 세례명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시는 축일은 6월 29일이지만 다른 축일을 원하시는 경우 다른 축일을 선택하셔도 무방합니다.

 

베드로(Peter) 축일 1. _ 6월 29일, 2월 22일

 

65. 1월 10일 성인 베드로 우르세올로(Peter Urseolus)

신분 : 총독, 수도승

활동연도 : 928-987년

같은이름 : 오르세올로, 우르세올루스,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뛰어난 군인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베네치아(Venezia) 공화국의 재건을 주창하는 정치인의 자질도 가지고 있었던 성 베드로 우르세올루스(Petrus Urseolus, 또는 베드로 우르세올로)는 978년 아내와 자식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베네치아를 떠나 피레네 산맥에 위치한 쿡사(Cuxa)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으로 가서 몇 해를 지내면서 은수자로 살았다고 합니다.

그 후 그는 베네치아의 총독이 되었는데, 수도원 부흥을 위하여 일하다가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살해당합니다.

베드로 오르세올로(Petrus Orseolo)로도 불리는 그에 대한 공경은 교황 클레멘스 12세(Clemens XII)에 의해 1731년에 승인되었습니다.

 

66. 8월 2일 성인 베드로 율리아노 예마르(Peter Julian Eym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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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율리아노 예마르 (8월 2일)

신분 : 신부, 설립자

활동연도 : 1811-1868년

같은이름 : 베드루스, 에마르, 율리아노, 율리아노스, 줄리앙,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프랑스 그르노블(Grenoble)의 라 뮈르 디제르 출신인 성 베드로 율리아누스 예마르(Petrus Julianus Eymard)는 칼장수였던 부친의 일을 18세 때까지 거들었는데 남는 시간이 있으면 라틴어를 배웠습니다. 1831년에 그르노블의 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1834년 7월 20일에 사제가 되었고 5년 동안 샤트와 몽테나르 본당 사목자로 일하던 중 마리스타가 되기 위하여 주교의 허락을 청하였습니다.

1839년 ‘마리아의 작은 형제회’(마리스타 교육 수사회)에 입회하여 수련을 받고 벨리 소신학교의 영적 지도자가 된 그는 1845년 리옹(Lyon) 수도원의 관구장이 되었습니다.

1851년 성 베드로 율리아노 예마르 신부는 노트르담 드 푸르비에르를 순례한 후 ‘성체 사제회’ 설립을 구체화시켰습니다.

1856년 마리스타 총장의 승인을 받았으며 파리(Paris)의 대주교를 12일 동안이나 설득하여 승인을 받게 되는데 그의 이러한 노력으로 1857년 1월 6일 이 수도회가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1858년 ‘성체 시녀회’를 설립하였고, 1895년에 교황청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Joannes-Maria Vianney, 8월 4일) 신부도 그를  ‘성인’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참으로 위대한 성인이었으며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1925년 시복되었고, 교황 요한 23세(Joannes XXIII)에 의해 1962년 12월 9일 시성되었습니다.

 

67. 2월 8일 성인 베드로 이네오(Peter Igneus)

신분 : 추기경, 주교

활동지역 : 알바니아(Albania)

활동연도 : +1080년경

같은이름 : 이그네우스, 이네우스, 이녜오, 이녜우스,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이탈리아 피렌체(Firenze)의 알도브란디니(Aldobrandini) 가문 출신인 성 베드로 이네우스(Petrus Igneus)는 성 요한 괄베르투스(Joannes Gualbertus, 7월 12일)의 지도하에 발롬브로사(Vallombrosa)에서 베네딕토 회원으로 수도서원을 하였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원장의 명에 따라 한 가지 시험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는 길이 10피트, 폭이 5피트가 되는 두 나무 기둥을 좁은 길에 세우고 그 사이를 무사히 통과해야만 하는 시험이었습니다.

이 두 기둥은 자연 발화되어 불타고 있었는데 열렬히 기도하면서 미사를 봉헌한 뒤 수많은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험장으로 나간 성 베드로는 오로지 전능하신 하느님께 매달리면서 불꽃에서 구해달라고 애원하고는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불꽃은 마치 구약의 다니엘(Daniel)과 그 동료들을 불태우지 않았던 것처럼 그에게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았는데 이 사건으로 인하여 그는 '이네오', 즉 불 속에서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은 사람이란 별명을 얻었고, 후일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Gregorius VII)에 의하여 알바니아의 추기경 주교로 임명되었습니다.

교회미술에서 성 베드로는 십자가를 쥐고, 장백의를 입고, 영대를 걸친 채 성 요한 괄베르투스를 향해 불을 통과하는 젊은 수사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68. 12월 21일 성인 베드로 카니시오 (Peter Canis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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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카니시오(12월 21일)

신분 : 신부, 교회학자

활동연도 : 1521-1597년

같은이름 : 가니시오, 가니시우스, 카니시우스,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네덜란드 동부 네이메헨(Nijmegen)에서 아홉 차례나 시장으로 선출된 야곱 카니스(Jacob Kanis)의 아들로 태어난 성 베드로 카니시우스(Petrus Canisius, 또는 베드로 카니시오)는 성 베드로 카니스로도 불리고 있습니다.

법률가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독일의 쾰른(Koln) 대학교로 간 그는 그 대학의 저명한 교수이며 예수회원이던 성 베드로 파브르(Petrus Faber, 8월 1일) 신부의 영향을 받아 신학으로 전향하게 되고 1543년에 예수회에 입회합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유산을 모두 나눠 준 후 1546년에 사제품을 받은 그는 사제가 된 후 신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설교로 유명해집니다. 그는 트렌토(Trento) 공의회의 여러 회의에 참석했고,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Ignatius, 7월 31일)가 시칠리아(Sicilia)의 메시나(Messina)에 설립한 예수회의 첫 번째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기도 합니다. 그러던 중 바이에른(Bayern)의 빌리암 4세 공작이 그곳의 프로테스탄트들을 물리치고 가톨릭을 재건하기 위하여 그의 도움을 요청하여 1549년에 잉골슈타트(Ingolstadt)로 가게 되고 이와 비슷한 일을 오스트리아의 빈(Wien)에서도 수행했는데, 상당한 성과를 거두면서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성 베드로 카니시우스는 오랫동안 프로테스탄트에 대항하여 가톨릭의 신앙을 옹호하는 일을 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그런 주제를 다루는 책을 저술하기 시작했는데 독일어 교리서의 첫판을 출판하자 선풍적인 반응을 일으켰고, 즉시 15개국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1556년에 프라하(Prague)로 파견되어 그가 그곳에 새로 짓는 대학교를 위해 일하는 동안에, 남부 독일과 보헤미아(Bohemia) 그리고 오스트리아로 구성된 새 관구의 관구장으로 임명되었고 그는 독일 전역을 순회하면서 강의하고 설교하였습니다.

그는 프로테스탄트를 반박했으며, 여러 개의 대학을 설립하고, 그가 설교하는 도시의 가톨릭을 부흥시켰으며, 폴란드에 예수회를 널리 보급한 장본인이었으며 1559년부터 1565년 사이에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대성당의 대표적인 설교자로 활동하였습니다. 아주 정열적인 사람이었던 그는 30년 동안 도보로 또는 말을 타고 2만 마일을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가톨릭의 부흥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으며 후일 독일의 딜링엔(Dillingen), 오스트리아의 인스브루크(Innsbruck), 프리부르(Fribourg)에서 끝까지 교육과 집필에 전념하다가 1597년 12월 21일 프리부르에서 선종하였습니다. 

 

현대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조차 ‘고상한 예수회원’, ‘결점 없는 인품을 지닌 사람’으로 평할 만큼 트렌토 공의회에 연이어 일어난 가톨릭 재건 운동의 대표적 인물로 꼽히는 그는 그 당시 논객들 가운데에서 가장 예의 바르고 올바르며 예리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일찌감치 펜과 신문의 영향력을 간파했기 때문에 모든 인쇄업자와 출판사에 용기를 북돋워 주었으며 알렉산드리아의 성 키릴루스(Cyrillus)와 교황 성 대 레오 1세(Leo I) 전집을 편집하였고,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의 편지를 비롯해 순교 신학, 성무일도 개정 그리고 가톨릭 공과(기도서) 등 수많은 저서를 출판하였던 그를 사람들은 ‘독일의 두 번째 사도’로 부르고 있습니다.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1864년 시복되었고,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1925년 5월 21일 성인품에 오르며 교회학자로 선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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