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Peter)
베드로(Peter)는 서울대교구의 신자의 세례명 중 3번째로 많은 세례명으로 6월 29일인 축일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계시지만 다른 축일을 원하시는 경우 다른 축일을 선택하셔도 무방합니다.
베드로(Peter) 축일 1. _ 6월 29일, 2월 22일
60. 7월 9일 성인 베드로 산즈 (Peter Sanz)
신분 : 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 중국
활동연도 : +1747년
같은이름 : 제드루스, 산즈, 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1747년과 1748년 사이에 중국의 푸첸 지방에서는 성 베드로 산즈(Petrus Sanz) 주교와 네 명의 사제들이 순교하였는데 성 프란치스코 세라노(Franciscus Serrano), 성 요아킴 로요 페레스(Joachim Royo Perez), 성 요한 알코버 피구에라(Joannes Alcober Figuera) 그리고 성 프란치스코 디아스(Franciscus Diaz)입니다. 다섯 명의 에스파냐 선교사들은 모두 젊은 나이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려는 열망으로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지도자였던 성 베드로 산즈 주교는 에스파냐 북동부 카탈루냐(Cataluna)의 아스코 출신으로 1714년에 중국에 입국하여 활동하였으며 1730년에는 모리카스트로의 주교로서 선교단의 책임자였는데 순교하기 전에 동료들에게 “용기를 잃지 마시오. 하느님의 법을 위하여 죽는 것이 기쁘지 않습니까?”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습니다.
성 베드로 산즈 주교와 동료 사제들은 모두 2000년 10월 1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중국 교회 순교자 120위의 일원으로서 함께 시성되었습니다.
61. 4월 28일 성인 베드로 샤넬(Peter Chanel)
신분 : 신부, 선교사, 순교자
활동연도 : 1803-1841년
같은이름 :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1803년 7월 12일 프랑스 동부 앵(Ain) 지역의 벨레(Belley) 교구에 속한 퀴에(Cuet)의 한 농장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성 베드로 샤넬(Petrus Chanel)은 어려서부터 목동으로 일하였는데 12살 무렵 한 교구 사제가 부모를 설득해 그가 만든 작은 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경건함과 총명함을 지녔던 그는 1817년 첫영성체를 하고 해외 선교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는데 1819년 16살이 되자 멕시미외(Meximieux)의 소신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한 후 부르(Bourg)의 대신학교에 들어가 교육과정을 마친 후 1827년 7월 15일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1년 뒤 제네바 근처에 있는 암베리외(Amberieux) 대목구로 파견된 그는 여건이 불충분한 본당에서 3년 동안 본당신부로 사목하였으며 1831년 장 클로드 콜랭(Jean-Claud,e Colin) 신부가 외방 선교를 위해 리옹(Lyon)의 신학생들과 함께 설립한 마리아 선교 수도회(The Society of Mary, Marists Fathers)에 입회하여 5년간 벨레 신학교의 교수로 재직하였습니다.
1836년 신설된 리옹의 마리아 선교 수도회를 인준하면서 남태평양의 뉴헤브리디스(New Hebrides) 제도를 선교 활동 지역으로 지정한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ius XVI)는 오세아니아주 대목구를 선교지로 위임하였는데 그해에 성 베드로 샤넬은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장 밥티스트 퐁팔리에(Jean Baptiste Pompallier) 주교가 선교를 위해 구성한 소규모 팀에 참여하여 오세아니아의 폴리네시아(Polynesia)로 파견됩니다.
그러나 당시 폴리네시아 여왕이 런던 선교회의 선교사이자 상인인 영국 영사의 반대를 두려워해 그들을 다른 섬에서 활동하도록 하는데 결국 성 베드로 샤넬은 평수사 1명과 통역에 능통한 영국인 평신도와 함께 1837년 11월 12일 타이티(Tahiti) 섬 서쪽에 있는 푸투나(Futuna) 섬에 정착하게 됩니다.
당시 푸투나 섬은 피지(Fiji) 섬 근처에 있는 프랑스령으로 공공연히 식인(食人) 풍습이 자행되고 있었는데 이런 곳에서 성 베드로 샤넬은 5년 동안 생활하게 되고 처음 두 해 동안은 큰 어려움 없이 선교 활동을 하며 일부 섬 주민들을 개종시키고 어린이들에게 세례를 주는 등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으며 현지 언어를 배워 익히면서 점차 그곳 주민들의 신임을 얻어갔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주민들의 신뢰가 커지자 제사장을 겸하는 추장의 질투와 견제를 받게 되며 추장의 아들과 다른 젊은이들에게 세례를 주려고 하자 추장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그와 함께 활동했던 동료 수도자들은 3년 만에 섬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남아 버티는데 결국 1841년 4월 28일 추장이 보낸 사람들에 의해 살해당합니다.
성 베드로 샤넬은 죽어가면서도 모두를 용서하며 섬 주민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는데 그가 사망한 후에도 그에 대한 섬 주민들의 사랑과 존경은 개종의 물결로 이어졌고, 1843년에 섬 주민 모두 가톨릭 신자가 되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일찍부터 그의 시복 절차가 시작되어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1889년 11월 17일 복자로 선언되었고,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하여 1954년 6월 12일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마리아 선교 수도회의 첫 순교자이자 푸투나 섬에서 순교한 최초의 오세아니아 순교자인 그는 오세아니아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62. 2월 6일 베드로 수케지로(Peter Sukejiro)
신분 : 순교자, 3회원
활동지역 : 나가사키(Nagasaki)
활동연도 : +1597년
같은이름 :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로, 페트루스, 피터
프란치스코회 3회원이자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의 성구(聖具) 보관인이었던 성 베드로 수케지로(Petrus Sukejiro)는 교리교사로도 활동하였으며 감옥에 갇힌 동료들을 돌보던 중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와 동료들과 함께 함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하게 됩니다.
1627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1862년 6월 8일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26위의 일본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시성되었습니다.
63. 4월 27일 성인 베드로 아르멘가우디오(Peter Armengaudius)
신분 : 수사
활동연도 : 1238-1304년
같은이름 : 베드루스, 아르멘골, 아르멩골, 아르멘가우디우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에스파냐의 타라고나(Tarragona)에서 우르겔(Urgell) 백작 가문의 아들로 태어난 성 베드로 아르멘가우디우스(Petrus Armengaudius)는 10대의 나이에 산적의 무리들 틈에 끼어들었는데 1258년 아라곤(Aragun)의 국왕 제임스는 이 지역의 산적들을 소탕하기 위하여 베드로의 아버지를 대장으로 삼아 군대를 파견합니다. 전투가 임박하여 아들이 적장을 살펴보다가 그의 부친을 발견하고는 큰 충격을 받고 용서를 청하고 이때부터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보속을 하였고 메르체다리오 회원이 되어 포로들의 석방을 위해 맹활약하게 된 그는 두 번이나 아프리카로 가서 무어인들에게 잡힌 포로들을 석방시켰는데, 두 번째 여행에서 돈이 부족하여 18세 된 소년을 석방시킬 수 없게 되자 그는 자원하여 포로가 됩니다.
그래서 성 베드로는 교수형을 받았지만 목을 묶은 끈을 풀었을 때 되살아났기 때문에 무어인들이 그를 석방시켰다고 전해집니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와 10여 년을 더 살면서 덕을 닦다가 선종하였는데 로마 순교록에는 그가 순교했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1686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11세(Innocentius XI)에 의해 그에 대한 공격이 승인되었고 그는 베드로 아르멘골(Petrus Armengol)로도 불리고 있습니다.
64. 9월 17일 성인 베드로 아르부에스(Peter Arbues)
신분 : 순교자
활동연도 : 1440-1485년
같은이름 :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에스파냐 북동부 아라곤(Aragun)의 에필라에서 태어난 성 베드로 아르부에스(Petrus Arbues)는 이탈리아 볼로냐(Bologna)의 에스파냐계 대학에서 신학과 교회법을 공부하였고 매우 우수한 성적을 얻었으며 그의 덕과 열심은 뛰어났으므로 그는 수도생활을 갈망하였으나, 너무 뛰어난 학문적 지식 때문에 자기 혼자 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1484년 아라곤 왕국의 심문관으로 발탁되었으나 그는 이를 곧 사임하고는 배교자들을 상대로 설교 생활을 하며 시민들의 부도덕성과 악습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돌아다닙니다. 이러한 그의 열성이 많은 적들을 만들었고 가학성 음란증을 지녔던 폭군의 분노를 일으킵니다.
1485년 그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을 때 3명의 자객이 사라고사(Zaragoza)의 구세주 성당으로 들어왔는데 이틀 뒤 그는 시체로 발견됩니다.
1664년 교황 알렉산데르 7세(Alexander VII)에 의해 시복되었고,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1867년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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