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Peter)는 2020년 서울대교구에서 조사한 서울한 바에 따르면 서울대교구 신자의 세례명 중 3번째로 많이 사용하는 세례명입니다.
베드로는 118명이 계시고 그중 가장 많이 사용하시는 축일은 6월 29일입니다.
베드로를 세례명으로 하고 싶으신데 다른 축일을 택하고 싶으신 분은 다른 베드로 세례명들 중에서 선택하셔도 무방하며 국내 베드로 성인도 많아서 효주 아녜스의 경우처럼 이름과 세례명을 함께 사용하셔도 좋습니다.
80. 5월 29일 복자 고성대 베드로 (高聖大 Peter)
신분 : 독신, 순교자
활동지역 : 한국
활동연도 : ? ~ 1816년
같은이름 : 고베드로, 고 베드로,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여빈’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던 고성대(高聖大) 베드로(Petrus)는 충청도 덕산의 별암(현,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에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 부모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습니다. 본디 성격이 매우 포악하여 사람들이 가까이하기를 꺼렸던 그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뒤로는 성격이 바뀌게 됩니다.
부모님께 효성을 다하였던 고 베드로는 아버지가 병으로 눕게 되자 아우인 고성운 요셉과 함께 아버지의 회복을 위해 8개월 동안 열심히 기도하였으며 그들 형제는 언제나 합심하여 성경을 읽고 다른 사람들을 권면하는 데 열심히여서 모든 신자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이후 고산 저구리(현, 전북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로 이주하여 생활하던 고 베드로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전주로 끌려갔는데 처음에는 용감하게 신앙을 증언하다가 목숨을 보전하려는 유혹에 넘어가 석방되었습니다. 고 베드로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으며 이후 가끔씩 “이 큰 죄를 보속 하려면 칼을 맞아야 마땅하다.”라고 되뇌곤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경상도의 청송 노래산(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 2리)으로 아우와 함께 이주한 그는 그곳 신자들과 함께 비교적 평온한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고 베드로와 요셉 형제는 1815년 교우들과 함께 예수 부활 대축일을 지내다가 밀고자를 앞세운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는데 그해 2월 22일경입니다. 고 베드로는 문초와 형벌을 받는 가운데서도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신앙을 굳게 지켰고 그러자 경주 관장은 그들 형제를 비롯하여 배교를 거부하는 모든 교우를 대구로 이송하였고 그곳에서 또다시 문초와 형벌이 여러 차례 이어졌으며 17개월이 넘게 괴로운 옥중 생활을 해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결같이 이러한 고통을 참아 내고 신앙을 증언하였고 고성대 베드로 형제가 형벌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는 것을 보고 대구의 감사는 다음과 같이 조정에 보고하였습니다.
고성대와 고성운 형제는 어리석고 무식한 무리로 천주교에 미혹되어 깨달을 줄 모르기에, 엄한 형벌을 하여 깨우쳐 주려고 하였으나 끝내 마음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또 한 번 죽기로 한 마음을 목석과 같이 고집하니, 그들의 죄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고 베드로는 사형 판결을 받았고, 아우와 함께 대구 형장에서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고 베드로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이듬해 3월 2일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습니다.
2014년 8월 16일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가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하였고 이때 고성대 베드로는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습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의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었으며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 등으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습니다.
81. 5월 29일 복자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金耆良 Felix Peter)
신분 : 중인, 상인, 순교자
활동지역 : 한국
활동연도 : 1816-1867년
같은이름 : 김 펠릭스 베드로, 김펠릭스 베드로,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펠리체, 피터
1816년 제주 섬 함덕리(현, 제주도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김기량(金耆良) 펠릭스 베드로(Felix Petrus)를 사람들은 ‘김 선달’이라고 불렀습니다. 배를 타고 다니면서 장사를 하던 그는 동료들과 함께 무역을 하려고 바다로 나갔다가 1857년 2월 18일(음력 1월 24일)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1개월 이상이 지난 3월 26일, 동료들은 이미 탈출하여 죽은 상태였으며 그는 중국의 광동 해역에서 영국 배에 의해 구조됩니다. 이후 홍콩의 파리 외방 전교회 극동 대표부로 보내진 그는 이곳에서 조선 신학생 이 바울리노와 프랑스 선교사들을 만나게 되는데 당시 그곳에서 휴양 중이던 이 바울리노는, 그를 만난 다음 날부터 그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마음이 쏠려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신앙심이 매우 깊어졌는데 그 후 홍콩의 부대표인 루세이유(J. J. Rousseille) 신부에게 1857년 5월 31일에 세례를 받고 조선으로 귀국하였습니다. 귀국 직후, 1858년 3-4월에 고향인 제주로 내려가기 전 페롱(S. Feron, 權) 신부와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만날 수 있었는데 이때 신부들은 그가 ‘제주의 사도’가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실제로도 가족과 그의 사공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데 열중하던 그는 이듬해 봄 육지로 나와 교구장인 성 베르뇌(S. Berneux, 張敬一) 주교를 만나 성사를 받기도 합니다.
이후로도 육지를 오가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김 펠릭스 베드로는 그러던 중 1865년에는 두 번째로 난파하여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하게 되고 그곳에서 프티장(Petitjean) 신부를 만나 다음 해에 귀국하였습니다.
이후 육지로 다시 나와 리델(F. Ridel) 신부를 방문한 그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사공 2명을 세례 받도록 하였으며 이 무렵에 다음과 같은 천주가사를 지어 불렀다고 합니다.
어와 벗님들아 순교의 길로 나아가세. / 그러나 순교의 길로 나아가기는 어렵다네. / 나의 평생소원은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섬기는 것이요, / 밤낮으로 바라는 것은 천당뿐이로다. / 펠릭스 베드로는 능히 주님 대전에 오르기를 바라옵나이다.
그러나 제주의 복음화를 위한 그의 노력은 1866년의 병인박해로 중단될 수밖에 없었는데 박해가 일어난 직후, 그는 여느 때처럼 경상도 통영으로 무역을 하러 나갔다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그곳의 게섬(현, 경남 통영시 산양읍 풍화리)에서 체포되었고 통영 관아로 끌려가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굴복하지 않고 굳게 신앙을 지킨 그는 옥에 갇혀서는 함께 있던 교우들에게 “나는 순교를 각오하였으니, 그대들도 마음을 변치 말고 나를 따라오시오.”라고 권면하였고 통영 관장은 대구 감사에게 ‘김기량과 그 동료들을 배교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보고하게 됩니다.
감사는 ‘그들을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김 펠릭스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다시 혹독한 매질을 당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살아 있자 관장은 그들 모두를 옥으로 옮겨 교수형에 처하라고 명령합니다. 이때가 김기량 펠릭스 페드로의 나이는 51세였으며 1867년 1월(음력 1866년 12월)로 이때 관장은 그의 가슴 위에 특별히 대못을 박아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2014년 8월 16일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가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하였고 이때 고성대 베드로는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습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의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었으며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 등으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습니다.
82. 5월 29일 복자 김대권 베드로(金大權 Peter)
신분 : 순교자
활동지역 : 한국
활동연도 : ? - 1839년
같은이름 : 김 베드로, 김베드로,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충청도 청양의 수단이(현, 충남 청양군 사양면 신왕리)에서 태어난 김대권(金大權) 베드로(Petrus)는 보령의 청라동(현, 충남 보령군 청라면 청라리)으로 이주해 살았으며 대구에서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화춘 야고보의 형입니다.
아버지에게 어렸을 때부터 교리를 배워 왔으나, 그는 부모가 사망한 뒤부터 열심히 계명을 지키기 시작합니다. 한때 충청도 공주의 옹기점에서 일하며 생계를 꾸려 나가던 그는 이 무렵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어느 날 그의 아내가 호랑이에게 물려가 죽을 뻔하자 그 사고 뒤에 그들 부부는 지난날의 잘못을 서로 이야기하였으며 이후로는 아내와 화합해 화목한 가정을 꾸려 나가게 됩니다.
언제나 교리의 가르침에 따라 계명을 지키는 데에 열중하던 김 베드로는 주일마다 이웃에 복음을 전하였고 예수 성탄 대축일에는 근처의 산으로 올라가 기도하면서 밤을 새웠습니다. 그의 앞에 호랑이가 나타난 적도 있었는데, 그는 개의치 않고 기도를 다 하고 평소처럼 내려왔다고 합니다. 사순 시기 때에는 기도와 묵상을 거르지 않았고, 하루에 한 끼의 식사만을 하는 등의 생활을 하던 중 그의 아우 김 야고보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도 아우의 뒤를 따르겠다고 순교의 뜻을 밝혔습니다.
전라도 고산으로 이주하여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던 김 베드로는 1827년 정해박해 소식을 듣게 되는데 그는 교우들에게 피신을 권유하면서 본인은 천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조용히 기다립니다. 얼마 되지 않아 포졸들이 그 마을로 들이닥쳤고 그는 웃는 얼굴로 그들 앞에 나아가 순순히 고산 관아로 끌려가 고산에서 한차례 신앙을 증언하였고 곧 전주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는 “서적을 갖다 바치거나 교우들의 이름을 댈 수 없다.”라고 대답하였고 전주 관장이 그의 아들을 데려와 목에 칼을 겨누자 “이러한 일로 목이 잘리면 아들에게도 크나큰 영광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배교를 거부하였습니다. 이후 그의 아들은 유배형을 받았고 감사 앞으로 끌려가서도 김 베드로의 신앙은 변하지 않았는데 다시 혹독한 형벌을 받았음에도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은 수난의 은혜를 한 터럭만이라도 갚으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라면서 순교의 뜻을 드러냅니다. 그의 결심이 얼마나 굳었는지는 다음의 진술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매를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저의 살과 뼈에 사무쳐 있으므로, 사지를 자르거나 뼈를 부순다고 하여도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감사는 할 수 없이 그를 옥에 가두도록 명하였고 동료들과 함께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해야 했던 그는 그동안 세 번동안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면서 목숨을 건지기를 한결같이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다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임금의 명으로 1839년 5월 29일(음력 4월 17일) 전주 장터(숲정이)로 끌려 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게 됩니다.
2014년 8월 16일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가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하였고 이때 고성대 베드로는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습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의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었으며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 등으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습니다.
83. 5월 29일 복자 김정득 베드로(金丁得 Peter)
신분 : 증인, 순교자
활동지역 : 한국
활동연도 : ? - 1801년
같은이름 : 김베드로, 김 베드로,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충청도 홍주의 대흥 고을에서 태어나, 친척인 김광옥 안드레아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김정득(金丁得) 베드로(Petrus)는 ‘대춘’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립니다. 그 후에도 신앙생활에 열심이었던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 내용은 자세히는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김 베드로는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김 안드레아와 함께 교회 서적과 성물만을 지닌 채로 공주 무성산에 들어가 숨어 살면서 교리를 실천하는 데에만 노력을 기울이지만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던 그들의 이름 탓에, 포졸들은 그들의 종적을 쉽게 찾아내고 이후 베드로는 홍주로, 안드레아는 예산으로 각각 압송됩니다.
홍주 관장은 그를 배교시키기 위해 김 베드로가 끌려오자마자 엄한 문초와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으나 그는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에 감사의 명에 따라 김광옥 안드레아와 함께 청주로 이송되었고 이곳에서 김 안드레아와 함께 김 베드로는 서로를 권면하면서 형벌과 옥중의 고통을 견뎌 냈으며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8월 21일(음력 7월 13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여기에는 ‘그들의 고향인 예산과 대흥으로 압송하여 참수하라.’는 명령이 덧붙여졌고 당시 김정득 베드로에게 내려진 선고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국가의 금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사는 폐지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산속에 숨어 살면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이고 유혹하였으며, 형벌과 문초를 가하여도 아주 모질어서 굴복하지 않았다. 그 죄상을 생각해 보니,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다.
김 베드로와 김 안드레아는 예산까지 내려오는 동안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헤어질 시간이 되자 “내일 정오,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라며 작별 인사를 합니다. 김 베드로는 예산에서 조금 더 가 대흥 감옥에 수감되었고 이튿날인 1801년 8월 25일(음력 7월 17일) 읍내로 끌려 나가 칼날 아래 목숨을 바쳤습니다.
2014년 8월 16일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가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하였고 이때 고성대 베드로는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습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의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었으며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 등으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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