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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이야기/세례명 이야기

베드로(Peter) 축일 22.(96-97) _ 9월 20일(국내 성인)

 

베드로(Peter) 서울대교구 신자들이 2020년 가장 많이 사용하는 세례명 3위로 굉장히 많이들 사용하시는 세례명입니다. 그중 6월 29일이 축일인 베드로가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으나 다른 축일을 택하고 싶은 경우 마음에 드는 다른 베드로 중에서 선택하거나 국내 세례명 중 효주 아녜스, 대건 안드레아처럼 이름과 세례명을 함께 사용하셔도 좋습니다.

 

96. 9월 20일 성인 손선지 베드로 (孫-- Pe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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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선지 베드로 (9월 20일)

신분 : 회장, 순교자

활동지역 : 한국(Korea)

활동연도 : 1820-1866년

같은이름 :  손 베드로, 손베드로, 베드로,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로, 페트루스, 피터

 

충청도 임천 지방의 고인돌에서 태어난 성 손선지 베드로(Petrus)는 그는 부모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고 어릴 때부터 신앙과 품행이 남달리 뛰어났습니다. 샤스탕(Chastan, 鄭) 신부는 그가 어른이 되자 그를 전교회장으로 임명하였으며 결혼하여 슬하에 두 자녀를 두고 인자한 가장으로서 자녀 교육에 힘썼고 사소한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아 모범적으로 신자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가 거처하던 집은 마을의 공소였으므로 그는 더욱 세심한 주의와 노력을 기울이며 언제나 신자들을 위하여 봉사하며 살았습니다.

 

1866년 그가 47세가 되던 해 추수기에 접어들자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좀 완화되는 듯했으나 얼마 후 더욱 혹심한 박해로 변하였는데 그러던 어느 날의 공소 예절에서 신자들을 보고 그는 “곡식이 익으면 바람결에 날리어 땅에 떨어지는 법입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가올 박해에 나 같은 사람도 당신 곳간에 가두시려는 모양이군요.”라고 말하며 순교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무사하기를 원한다면 피신하라고 당부하였습니다.

 

그해 12월 3일 저녁에 가족과 함께 기도하고 있을 때 집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즉시 상황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가족들에게 피하라고 말한 뒤 자신은 교우임을 자백하며 순순히 체포되었습니다. 그를 구진포리 주막까지 데리고 간 포졸들은 먼저 붙잡아 온 다른 신자들과 함께 밤을 지내게 하였는데 그 사이 손 베드로의 어머니는 마을 원님을 찾아가 아들인 손 베드로를 구해달라고 애걸하였으며 손 베드로의 아들은 감영에 수시로 드나들며 아버지의 구명운동을 하였는데 이러한 소식을 들은 그는 아들의 효심에는 감동하였지만 크게 꾸짖으면서 “나에게는 큰 유혹이 된다. 내 말을 듣는 순간부터 그런 짓을 다시는 하지 말고,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감영에 오지 말라”라고 하면서 일을 중지시킵니다.

 

처형장으로 나설 때 그는 남아서 기다리는 다른 신자에게 자신의 옷을 주면서 “나는 이제 죽으러 가오. 이 옷은 더 이상 내게 소용이 없으니 이 옷을 입으시오”라고 말합니다.

 

사형장에 도착하자 그는 하늘을 향해 ‘예수 마리아’를 부르고 기도하였고 칼로 희광이가 어깨를 내려치자 그는 머리를 쳐들고 “장난하지 마시오.”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고 합니다. 그렇게 그는 1866년 12월 13일, 47세의 나이로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1968년 10월 6일 시복되었고,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1984년 5월 6일 시성되었습니다.

 

 

97. 9월 20일 성인 오 베드로(오매트르 베드로) (吳 Peter(Aumaitre Pe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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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매트르 베드로(9월 20일)

신분 : 신부, 순교자

활동지역 : 한국(Korea)

활동연도 : 1837-1866년

같은이름 : 베드루스, 오 베드로, 오베드로, 오매뜨르, 오메뜨르, 오메트르, 페드로, 페트로, 페트루스, 피에르, 피터

 

한국 성은 오(吳)이고 세례명은 베드로(Petrus)인 성 피에르 오매트르(Pierre Aumaitre) 신부는 1837년 4월 8일 프랑스 서부 앙굴렘(Angouleme) 교구의 뤼페크(Ruffec) 본당에 속한 에제크(Aizecq)라는 시골 마을에서 5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조그만 농지를 경작하며 신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꾸려갔으며 어려서부터 성 오매트르 베드로는 성실하고 부지런했지만 학업 성적이 뛰어나지는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첫영성체 교육을 받으면서 사제가 되겠다고 결심하지만 리슈몽(Richemont)의 소신학교에 입학하려 할 때에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본당신부는 성적 때문에 소신학교 추천을 꺼렸지만 나중에는 본당신부도 감탄할 만큼 매일 본당신부와 평신도에게 라틴어를 배우러 다닌 후에 결국 입학할 수 있었는데 입학한 뒤에는 특유의 성실함으로 부족함을 극복하였고 우등생이 됩니다. 5년의 소신학교 과정을 마치고 그는 앙굴렘 대신학교에 1857년 10월에 진학하고 소품자(小品者)로 파리 외방 전교회의 신학교에 1859년 8월 18일에 입학하며 1862년 6월 14일에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수품 후 그는 자신의 선교지가 조선임을 알게 되었고 가난한 가정에서 많은 은인들의 도움을 받아 사제가 된 그는 선교 사제가 되기까지도 부모의 강한 반대를 극복해야 했고 순교를 각오해야 했기에 조선으로의 파견은 쉬운 결정은 아니었으나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각오를 담아 부모에게 편지를 써 보냈으며 1862년 8월 18일 프랑스를 떠나게 되지만 박해로 인하여 조선으로의 입국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1863년 6월 말, 1년 가까운 노력 끝에  중국 어선을 타고 연평도 바다를 지나 무사히 조선 땅을 밟게 되었는데 입국 후 서울에서 그는 성 베르뇌 시메온(Berneux Simeon) 주교와 함께 지내게 되고 얼마 뒤에 조선말을 익히기 위해 용인의 손골(현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로 내려갑니다.

그 후 성 다블뤼 안토니오(Daveluy Antonius) 주교가 전교하던 내포(內浦) 지방에서 활동하다가 1864년 9월부터는 경기도의 한 지역을 맡아 사목하였는데 당시 오 베드로는 신부는 신자들에게 성모 신심을 키워주기 위해 특별한 일을 하였고 같은 시기에 조선에서 활동했던 칼레(Calais) 신부의 증언에 의하면 “오매트르 신부는 매년 최대한 장엄하게 성모성월 행사를 거행했으며, 교우들에게 이 아름다운 신심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다.”라고 전해집니다.

 

2년 남짓 본격적인 전교 활동을 펼치다가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의 소문이 나돌면서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마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수원의 샘골[泉谷里]에서 성사를 주고 있었는데 박해에 대한 소문에 신자들이 동요하자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는 성사를 중단하고 신자들을 진정시킨 뒤 미사와 전례 용구를 모두 감추고 3월 9일에 거더리(현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 있는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를 찾아갑니다.

여기서 주교와 성 위앵 루카(Huin Lucas) 신부 등과 함께 하루를 보낸 그는 거더리에서 15리(里) 떨어진 ‘소덜’로 피신하였고 배를 타고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와 함께 바다로 피신할 계획을 세우지만 역풍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을로 돌아옵니다.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가 3월 11일 거더리에서 체포되자 성 베드로 신부는 다음날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거더리로 와서 자수합니다. 이때 주교의 편지를 받은 성 위앵 루카 신부도 자수하여 거더리로 끌려옵니다.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는 함께 체포된 주교와 동료 신부와 함께 홍주 관아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는데 3월 19일 포도청에서 두 차례의 신문과 고문을 받는 중에도 그는 “이 세상의 형벌은 후세의 상”이라며 당당히 신앙을 증거하였고 결국 3월 23일 군문효수(軍門梟首)의 사형선고를 받게 되어 동료들과 함께 처형지인 충청남도 보령 수영(保寧水營)으로 이송되었습니다. 당시 국혼(國婚)이 가까운 시기여서 서울에서 피를 흘리는 것이 나쁜 징조라 하여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보령 수영으로 처형지를 정했기 때문입니다.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는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 · 성 위앵 루카 신부 · 성 장주기 요셉(張周基, Josephus) · 성 황석두 루카(黃錫斗, Lucas)와 함께 죽음의 행진을 시작하였고 주님 수난 성금요일인 1866년 3월 30일, 그의 나이 29세에 처형장인 갈매못(현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의 월계관을 썼습니다.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를 포함하여 갈매못에서 순교한 5위의 순교자 중 성 황석두 루카의 시신은 가족들이 거두어 홍산 삽티(현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를 거쳐서 고향인 연풍 병방골(충청북도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에 이장하였고 연풍 순교성지로 1982년 천묘(遷墓)하였으며 나머지 4위 순교자들의 시신은 사흘 뒤 신자들에 의해 거두어져 형장 부근에 묻혔다가 몇몇 신자들이 6월 초 죽음을 무릅쓰고 모셔와 서짓골(충남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에 매장하였습니다. 그 후 제7대 조선 교구장인 블랑(Blanc, 白) 주교의 지시로 1882년 3월 발굴되어 일본 나가사키(長崎) 대교구의 오우라 성당으로 옮겨졌고 그 후 12년 만인 1894년 5월에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명동 성당에 1900년부터 안치되었습니다.

그리고 시복식을 앞둔 1967년 절두산 순교성지 내의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의 지하 성인 유해실에 안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성 오매트르 베드로 신부는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1968년 10월 6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의 한 명으로 시복되었고,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9월 20일에 그의 축일을 함께 경축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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