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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이야기/세례명 이야기

베드로(Peter) 축일 23.(98-100) _ 9월 20일(국내 성인)

 

베드로(Peter)는 2020년 서울대교구 신자들의 세례명 중 가장 많이 사용하는 세례명 3위의 세례명으로 그중 대부분 6월 29일이 축일인 베드로를 사용하지만 다른 축일을 원할 경우 마음에 드는 다른 베드로 중에서 선택하거나 효주 아녜스, 대건 안드레아처럼 국내 세례명으로 결정하여 이름과 세례명을 함께 사용해도 좋습니다.

 

98. 9월 20일 성인 유대철 베드로 (劉大喆 Pe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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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유대철 베드로 (9월 20일)

신분 : 소년, 순교자

활동지역 : 한국(Korea)

활동연도 : 1826-1839년

같은이름 : 유 베드로, 유베드로,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로, 페트루스, 피터

 

역관 유진길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장남인 성 유대철 베드로(Petrus)의 집안은 부자는 열심히 천주교를 믿었지만 모녀는 이를 반대해 가정에 불화가 끊이질 않았고 신자들을 욕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어째서 너는 부모의 말에 순종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일을 고집하느냐?”라고 말씀하시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복종하겠지만 하늘의 임금, 만물의 주님의 법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베드로는 온순하게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유 베드로는 하느님 앞에서 어머니의 눈이 어두움을 한탄하면서도 언제나 지극한 효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박해가 일어나자 당시 옥에 갇혀있던 부친과 여러 신자들의 본보기는 그의 마음에 순교하고자 하는 열렬한 욕망을 불러일으켰는데 그래서 그는 아버지가 체포되자 하느님께 대한 열광적인 사랑에 끌려 1839년 7월경 자수하게 됩니다. 재판관은 그에게 집안 내력을 자세히 물어본 후 신자의 자식임을 알게 되자 옥에 가두었고 배교한다는 말을 하게 하기 위해 어르고 엄포하고 고문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모두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옥사장이 그에게 혹형을 가하여 갈기갈기 몸이 찢기고 사방에서 피가 흘러내렸지만 이 용감한 어린이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어떤 포졸이 하루는 구리로 된 담뱃대 통으로 유 베드로의 허벅지를 들이박아 살점을 한 점 떼어내면서 소리쳤습니다. “이래도 천주교를 버리지 않겠느냐?” “그러면요, 이쯤으로 배교할 줄 아세요?” 그러자 포졸들은 벌겋게 달군 숯 덩어리를 들고 입을 벌리라고 하였는데 그가 “예” 하고 입을 크게 벌리자 오히려 포졸들은 놀라서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다른 교우들이 “너는 아마 많은 괴로움을 당한 줄로 생각하겠지만 큰 형벌에 비하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고 그에게 말했는데 그는 “저도 잘 알아요. 이건 쌀 한 말에 대해서 한 알 같은 것이지요.” 하고 대답합니다. 그 후 그는 고문을 당한 끝에 까무러쳤는데 다른 죄수들이 그의 정신이 들게 하려고 허둥지둥하자 그는 “너무 수고를 하지 마세요. 이런 것으로 해서 죽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고 말해 형리들을 더욱 놀라게 하였습니다.

 

문초받기를 1회, 고문 14회, 태형 6백대 이상과 치도곤 45대 이상을 맞아도 항상 기쁜 얼굴로 지내는 유 베드로를 보고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생각하였으며 관헌들은 어린 그를 죽이면 군중이 반발할까 두려워 형리가 옥 안으로 들어가 1839년 10월 31일 상처뿐인 작은 몸뚱이를 움켜쥐고 목에 노끈을 잡아매어 죽입니다. 이때의 베드로의 나이는 겨우 14살이었습니다.

그는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1925년 7월 5일 시복되었고,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1984년 5월 6일 시성되었습니다.

 

 

99. 9월 20일 성인 유정률 베드로 (劉正律 Pe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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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유정률 베드로(8월 20일)

신분 : 회장, 순교자

활동지역 : 한국(Korea)

활동연도 : 1837-1866년

같은이름 : 유 베드로, 유베드로,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로, 페트루스, 피터

 

평안도 윤리면 논재골에서 태어난 성 유정률 베드로(Petrus)는 어려서 부모를 잃어 고아가 되었으며 호구지책으로 짚신을 삼아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어쩌다가 돈이 생기면 노름판으로 뛰어가는 일이 종종 있는데 그러다가 이덕표라는 친척의 권유로 천주교를 알게 되고 그 후 교리를 배워 1864년경에 서울에 있던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로부터 영세 입교하였습니다.

 

순교할 때까지 아주 짧은 신앙생활을 하였지만 그의 열심은 실로 놀라웠는데 세례를 받은 후에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발견하였노라” 하며 그는 자신의 기쁨을 큰소리로 표현하였습니다. 원래 성격이 급했던 그는 아내가 고집을 부리고 대들면 참지 못하고 부부 싸움을 하기도 하고 다투다가 아내를 때리기도 하였는데 영세한 뒤로는 아내를 때리는 버릇을 고치기 위해 짚신처럼 생긴 나무토막을 가지고 자기 몸을 때리며 때로는 피를 흘려가면서 자문자답하였는데 “너 아프지? 제가 아프면 또한 네가 때리는 남도 아플 것이 아니겠느냐?”라고 하였고 부인 역시 크게 달라진 남편을 보고 감화를 받아 착하고 상냥한 아내가 되었습니다. 

 

유 베드로의 마음속에 점차 신앙이 더해감에 따라 많은 이들을 교회로 이끌었는데 1866년 초에 친척집을 찾아다니면서 그는 “평안히 계십시오. … 오늘 가면 언제 다시 뵐지 모르겠습니다. …”라는 고별인사를 하고 다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는데 그날 저녁 무렵에 공소가 있는 고둔리라는 마을로 가서 그는 신자들이 함께 기도하고 새해 인사를 하게 됩니다.

 

이날 밤 유달리 교우들이 많이 모였는데 회장이 복음을 읽고 강론을 하려고 할 때 갑자기 포졸들이 들이닥쳤습니다. 교우들은 조용히 체포되었지만 마침 그날이 설날이었기에 많은 신자들이 포졸들에게 술을 대접하는 틈을 이용해 피신하였고 유 베드로와 몇 명의 신자들만 남아 포졸들에게 잡히게 됩니다. 포졸들과 먼 길을 가면서 유 베드로는 “오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주 예수께서 우리를 불러 주셨도다.”라고 말하며 즐거워하면서 평양 감영으로 끌려갔습니다.

 

문초가 시작되자 한결같이 신앙을 고백하던 신자들은 심한 곤장을 맞고는 4명이 배교하였고 유 베드로와 정 회장만이 남았는데 얼마 후 정 회장도 배교자와 친구들을 따라 가 결국 유 베드로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감사는 화가 치밀어 배교자들을 불러들여 곤장을 주며 유 베드로를 쳐 죽이라고 명을 내리는데 제 목숨을 건지기 위해 배교자들은 유 베드로를 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유 베드로는 자기를 때리는 동료들에게 “살이 살을 잡아먹는구나.”라고 말하며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그 후 감사의 명에 따라 배교자들은 그의 시신을 대동강에 버렸는데, 붉은 피가 얼마 후 물 위로 번져 나갔고, 그의 시체는 신기하게도 가라앉지 않고 계속 둥둥 떠 있었으며, 매 맞은 자리에서는 이상한 광채가 나고 빛났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가 순교한 나이는 그의 나이 30세, 1866년 2월 17일입니다. 이후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1968년 10월 6일 시복되었고,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1984년 5월 6일 시성되었습니다.

 

 

100. 9월 20일 성인 이명서 베드로 (李-- Peter)

신분 : 농부, 순교자

활동지역 : 한국(Korea)

활동연도 : 1821-1866년 같은이름 베드루스, 이 베드로, 이베드로, 페드로, 페트로, 페트루스, 피터

 

충청도의 어느 열심한 신자 집안에서 태어난 성 이명서 베드로(Petrus)는 박해를 피해 이리저리 다니다 보니 고향을 등지게 되었고, 나중에는 완주군 구이면 고소대에서 오랫동안 살게 되는데 이 때문에 고소대 사람이라고도 합니다. 1866년에 다시 전주 성지동으로 이사한 그는 예의범절이 깍듯하고 온순한 성품과 착한 마음씨를 지녀 어진 사람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가슴앓이로 고생을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다가올 박해를 예상하고 성지동 신자들이 한 자리에 모이자 “사세가 그렇게 다급하게 되었다면 빨리 피해야지요, 나는 병 때문에 피하지 못할 처지이고 천주님의 안배에 의지할 따름입니다. 필요하시다면 천주님의 부르심을 받을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내 병은 영원히 낫게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말하며 그는 순교할 뜻을 밝혔는데 1866년 12월 5일 저녁, 포졸들이 이 베드로의 집을 덮치자 그는 심경이 달라져 생에 대한 미련이 남아 포졸에게 애걸하지만 옆에 있던 조화서의 말을 듣고 “내 아까는 무서워서 그랬지만 사실은 나도 신자올시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리하여 그는 전주로 끌려가게 되어 감사 앞에서 문초를 받게 되는데 감사는 그가 가슴앓이 환자인 줄 알면서도 손발과 머리를 묶어 고정시킨 후 등허리를 난타하였습니다. 감사가 배교하라는 말하자 그는 “수십 번을 죽는다 해도 천주교를 따를 것이오.”라고 말하면서 단호하게 배교를 거부하였습니다. 결국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그는 “우리의 소원이 이렇게 빨리 이루어지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하면서 기뻐하였고, “오늘 치명하면 곧장 천국에 들어가 진복자들이 될 것입니다. 이 행복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며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전주 숲정이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1866년 12월 13일, 그의 나이 46세에 순교하였습니다. 그는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1968년 10월 6일 시복되었고,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1984년 5월 6일 시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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