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Peter)
104. 9월 20일 성인 최창흡 베드로 (崔昌洽 Peter)
신분 : 회장, 순교자
활동지역 : 한국(Korea)
활동연도 : 1787-1839년
같은이름 : 최 베드로, 최베드로,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로, 페트루스, 피터
서울의 중인 집안 출신인 성 최창흡 베드로(Petrus)는 1801년에 순교한 서울의 총회장 최창현의 아우이고 최 베드로와 같은 해에 순교한 손소벽 막달레나(Magdalena)의 남편이며 1840년에 순교한 최영이 바르바라(Barbara)의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를 열세 살 때에 여의고 형마저 순교하자 집안이 파산되어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였고 몇 해 동안 신자들과 떨어져서 어느 정도 냉담한 생활을 하였으나 신유박해가 끝난 1815년경 신자들과 다시 가까워져 기도문과 교리를 배워 익혔습니다. 그리고 지난날의 자신의 생활에 언제나 마음이 무거워 순교만이 잘못을 보속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확신하였으며 이에 순교하고자 하는 열렬한 원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30세경 서울 출신의 신유박해로 몰락한 집안인 손소벽 막달레나를 아내로 맞이해 자녀를 열한 명 낳았지만 아홉 명은 어려서 죽었습니다. 1821년 콜레라가 유행해 많은 사람들이 죽자 최창흡은 부인인 손 막달레나와 함께 대세를 받고 신자의 본분을 철저히 지켜 서울에 선교사들이 들어왔을 때에는 착실한 신자라는 평판을 듣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던 최 베드로는 그의 가족과 함께 6월에 포도대장 앞에 끌려가게 되는데 7회에 걸친 지극히 혹독한 신문(訊問)을 당하게 됩니다. 포장이 신문 중에 그에게 “네가 사도를 행하느냐?”고 묻자 “천주교에서 가르치는 진리 가운데 악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과연 천주교를 믿습니다.” 하고 분명하게 대답하였습니다.
“천주를 배반하라.”
“못합니다.”
“언제부터 천주학을 했느냐?”
“어려서부터 믿었습니다.”
이에 포졸들은 “이 놈은 그 교의 늙은 괴수로구나” 하고 소리를 지르며 욕하였으며 다시 그는 주리를 틀리고, 150도의 태형을 당하지만 신자를 고발하지도, 배교도 하지 않습니다.
형조로 옮겨서도 매우 혹독한 장형을 당하지만 불평하지 않았고 한결같은 모습을 보이자 그날로 사형이 언도되었는데 형장으로 끌려가며 옥졸에게 최 베드로는 “여감방에 있는 내 아내와 딸에게 가서 내 운명을 슬퍼하지 말라고 전해 주게. 그것은 너무나 인성을 따른 감정이어서 진실한 신자에게 마땅치 않은 일일 것이니, 오히려 주님을 찬미하고 이러한 큰 은혜를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잊지 말고 나를 따라오라고 전해 주시오.” 하고 전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수레를 타고서도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은 그는 옥에 갇힌 지 7개월 후인 12월 29일 참수형을 받고 그의 나이 53세에 주님의 품에 안깁니다.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1925년 7월 5일 시복되었고,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1984년 5월 6일 시성되었습니다.
105. 9월 20일 성인 최형 베드로 (崔炯 Peter)
신분 : 회장, 순교자
활동지역 : 한국(Korea)
활동연도 : 1814-1866년
같은이름 : 최 베드로, 최베드로,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로, 페트루스, 피터
충청도 공주(公州)에서 스무 살에 천주교에 입교한 최인호 야고보(崔仁浩, Jacobus)와 황 안나(Anna)의 3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난 1814년 태어난 성 최형 베드로(崔炯, Petrus)는 일명 ‘치장’으로도 불렸습니다. 14살(또는 8살) 때부터 형제들과 함께 부모님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웠으며 그의 동생인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崔方濟, Franciscus Javier)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 Andreas)와 최양업 토마스(崔良業, Thomas)와 함께 1836년 사제직을 준비하기 위해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다가 이듬해 병으로 사망한 신학생입니다. 그의 누이는 결혼을 거부한 채 평생 동정녀로 살다가 1856년경 선종하였고 그의 형 최수 베드로(崔燧, Petrus)는 옥중에서 신앙을 증거하던 중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절두산(양화진)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습니다. 이렇게 신심이 깊은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한문을 배웠지만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부모를 도와 농사일 등을 하며 가계를 도왔습니다.
1836년 1월에 입국한 성 모방 베드로(Maubant Petrus, 羅) 신부는 최방제를 신학생으로 선발하고 그의 형인 성 최형 베드로의 신심과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복사(服事)로 선발하였는데 그때부터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로 성 모방 베드로 신부가 순교할 때까지 그는 2~3년간 그의 복사로 생활하며 전교에 힘썼습니다. 그 무렵인 1838년경(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순교한 1946년경) 여 데레사(혹은 김 데레사)와 혼인한 그는 기해박해의 여파가 이어지던 1840년 아버지와 여러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관청까지 끌려가지는 않고 돈만 중간에 갈취당한 채 풀려납니다. 유학길을 떠났던 성 김대건 안드레아 부제가 어렵게 입국하여 서울에 도착한 1845년 1월 그를 도와서 조선 입국을 기다리던 페레올(Ferreol, 高) 주교와 성 다블뤼 안토니오(Daveluy Antonius, 安) 신부를 모셔오기 위해 상해(上海)로 배를 준비해 건너갔으며 그해 8월 17일 상해의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의 집전으로 조선교회의 첫 사제가 된 성 김대건 안드레아의 사제 서품식에 참석합니다. 그리고 작은 목선 ‘라파엘호’를 타고 상해를 8월 31일 출발하지만 풍랑을 만나 제주도 용수리 포구에 표착하고 다시 배를 수리해 10월 12일 밤 오늘날의 충청남도 강경읍 황산마을 인근 포구 또는 전라북도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 나바위의 후미진 장소에 무사히 도착합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1846년 9월 16일 병오박해(丙午迫害)로 순교한 뒤에 서울로 상경한 성 최형 베드로는 순청동(巡廳洞, 오늘날 서울시 중구 순화동과 봉래동 1가에 걸쳐 있던 마을)에 거주하며 생활하였고 얼마간 성 다블뤼 안토니오 신부의 복사로 활동하면서 남대문 밖에 조그마한 가게를 경영하며(또는 목수 일을 하며) 부유하게 살았는데, 틈틈이 묵주를 만들거나 종교 서적을 베끼면서 외교인과 예비 교우들을 친절하게 맞아들였습니다. 1856년 3월 성 베르뇌 시메온(Berneux Simeon, 張) 주교가 입국한 뒤에는 주교를 여러 차례 방문해 교회 일을 도왔으며 이에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는 교회 서적을 체계적으로 간행하기 위해 인쇄소를 서울에 세우고 1861년(또는 1862년) 인쇄소의 책임자로 그를 임명하였습니다. 주교의 명대로 그 일을 기꺼이 맡은 그는 4년간 여러 장애를 극복하며 “성교일과”(聖敎日課)와 “성찰기략”(省察記略) 등의 교회 서적을 간행하였습니다.
1863년 석정동(石井洞)으로 거처를 옮긴 그는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로부터 큰 신임을 받고 있었는데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가 1866년 2월 23일 체포되면서 많은 교회 서적이 적발되자 그는 일단 몸을 피하게 되지만 이선이(李先伊)라는 밀고자에 의해 그의 집이 알려지고 포졸들은 그의 집으로 들이닥치는데 그의 아내는 혹독한 문초로 피와 살이 범벅이 되면서도 남편의 피신처를 끝까지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집에 살던 14살의 하녀가 몰래 밤중에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그녀를 붙잡아 다그치며 곤장을 친 포졸들은 결국 그가 숨어 있는 곳을 알아냅니다.
3월 1일 포졸들은 최형 베드로를 체포해 온몸에 석회를 뿌리고 주먹으로 마구 때린 후 포도청으로 끌고 갔으며 천주교를 신봉한 죄와 사악한 책을 출판한 죄 그리고 다른 신자들을 선동한 죄 등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그의 사형 선고문에는 “혹심한 곤장에도 굴하지 않고 쇠나 돌같이 고집이 세어 사교를 단념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였다. 또 진리를 고백하면서 사형 선고문에 직접 서명까지 하였다. 이에 국법을 따라 마땅히 사형에 처하노라.”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함께 교회 서적을 출판했던 성 전장운 요한(全長雲, Joannes)과 함께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1866년 3월 9일, 53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습니다. 얼마 후 교우들이 그의 시신에서 어깨와 다리에 깊은 상처가 여럿 있었고 많은 뼈가 부서져 있는 것을 확인하였으며 “모든 신앙 증거자 중에서 가장 혹독한 고문을 당한 사람”이라고 교우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하였습니다.
순교 후 그의 시신은 왜고개(현 서울 용산구 한강로 3가)에 매장되었다가 성 남종삼 요한(南鍾三, Joannes)의 유해와 함께 발굴되어 1909년 5월 28일 명동 주교관으로 옮겨졌다가 명동 성당 지하 묘소에 6월 17일 안치되었으며 1968년 시복식을 계기로 다시 절두산 순교성지 내에 있는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지하의 성해실로 옮겨져 안치되었습니다. 성 최형 베드로는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1968년 10월 6일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의 한 명으로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106. 9월 20일 성인 홍병주 베드로 (洪秉周 Peter)
신분 : 회장, 순교자
활동지역 : 한국(Korea)
활동연도 : 1798-1840년
같은이름 : 홍 베드로, 홍베드로,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로, 페트루스, 피터
성 홍영주 바오로(Paulus)와 형제지간인 성 홍병주 베드로(Petrus)는 매우 유명한 가문의 자손들입니다. 그들의 조부는 1801년의 신유박해 때에 순교한 홍낙민 루카(Lucas)이고 그들의 삼촌은 1840년 전주에서 참수당한 홍재영 프로타시우스이며 아버지 홍빈영은 1801년 지긋지긋한 난을 치른 후 충청도 내포평야에 있는 서산 고을 여사울이란 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 형제는 신앙과 견실한 학식을 부모에게 유산으로 물려받았으며 그것을 잘 이용하여 이들 형제는 후일 천주교의 명성을 크게 높였습니다.
전교 신부들은 그들 형제의 학덕과 모범적인 신자생활을 익히 알고 있었으며 이에 지방의 회장으로 임명하였고 그들은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과 약한 자를 격려하는 일, 병자를 간호하는 일과 자선 사업에서 자신들의 직분을 아주 성실히 수행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본 모방(Manbant, 羅)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 역시 그들에게 교회의 여러 가지 중대한 일을 맡겼으며 그들 역시 기대에 부응하여 잘 처리하여 교회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1839년의 기해박해가 시작되자 그들은 성직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면 목숨을 잃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선교사들을 집에 모시고 접대하였습니다.
조정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김여상은 그들의 이름을 체포자 명단에 올려놓고 있다가 그해 9월에 그들을 붙잡았는데 형제는 순교자의 자손답게 하느님을 증거하였으며 다른 신자들을 고발하지 않았습니다. 이들 형제의 배교를 단념한 포장은 그들을 형조로 이송하였는데, 당시 이들의 친척이었던 형조판서 홍명주는 자신에게 해가 미칠까 두려워 부하들에게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그들을 배교시키되 사형선고 내리지 말라고 명하고 상관에게 잘 보일 생각으로 부하직원들은 형제를 배교시키지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형제는 끝까지 마음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들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졌고 당시의 법에 형제를 같은 날 죽이지 못하게 되어 있었기에 따로 형을 집행하게 되어 형인 홍 베드로는 1840년 1월 31일, 42세의 나이로 박종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와 같이 참수되었고, 동생인 홍 바오로는 다음날 형을 따라 39세의 나이로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습니다. 성 홍병주 베드로는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1925년 7월 5일 시복되었고,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1984년 5월 6일 시성되었습니다.
'종교 이야기 > 세례명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르첼리노(Marcellinus) 축일 1.(1-6)_ 1월 2일, 1월 9일, 4월 6일, 4월 20일, 4월 26일, 6월 2일 (0) | 2023.01.27 |
---|---|
나르치소(Narcissus) 축일 _ 1월 2일, 3월 18일, 9월 17일, 10월 29일, 10월 31일 (0) | 2023.01.26 |
베드로(Peter) 축일 24.(101-103) _ 9월 20일(국내 성인) (0) | 2023.01.05 |
베드로(Peter) 축일 23.(98-100) _ 9월 20일(국내 성인) (0) | 2023.01.04 |
베드로(Peter) 축일 22.(96-97) _ 9월 20일(국내 성인) (0) | 2022.12.3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