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오(Basil)
같은 이름 : 바실리우스
7. 11월 28일 성인 바실리오
신분 : 수도승, 순교자
활동연도 : +765년
비잔틴의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5세의 성상 파괴 박해가 거세게 휘몰아칠 때, 성 스테파누스(Stephanus)는 성화 공경의 옹호자로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의 최초 지도자였던 그는 원래 칼케돈(Chalcedon) 근방 성 아욱센티우스 산(Mount Saint Auxentius)의 은수자였으나, 성화 공경과 연루되어 3년 동안 마르마라 해(Sea of Marmara)의 프로콘네수스(Proconnesus) 섬으로 추방되었습니다. 석방되자마자 곧장 황제 앞으로 달려간 그는 황제상이 새겨진 동전을 하나 들고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여기에 박힌 황제상이 수모를 당한다면 참지 못하겠지요? 그런데 왕 중의 왕이신 그리스도와 그 모친이신 마리아의 상을 불 속에 처넣다니요?” 라고 말한 뒤 그는 동전을 내팽개칩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진노하여 그를 감옥에 가두게 하였는데, 이렇게 갇힌 수도자 수효가 300명을 넘었다고 합니다.
황제는 그를 사형에 처하라는 명을 내리지 못하였으나 그의 부하들이 성 스테파누스를 살해하였다고 합니다.
이때 성 바실리우스(Basilius, 또는 바실리오), 성 베드로(Petrus), 성 안드레아(Andreas) 등의 수도자들이 신앙을 지키다가 함께 순교하였습니다.
8. 1월 2일 성인 바실리오(대) (Basil the Great)
신분 : 주교, 교회학자, 교부
활동연도 : 329-379년
성 대 바실리우스(Basilius, 또는 바실리오)는 부유하고 이름 있는 그리스도교 집안 출신으로, 교회의 역사상 가장 뛰어난 가문 중의 하나입니다.
그의 할머니는 마크리나(Macrina, 1월 14일)이며 그의 부친은 바실리오(5월 30일), 그의 모친은 엠멜리아(Emmelia, 5월 30일)이며 그의 큰 누이는 마크리나(7월 19일), 그리고 두 동생은 니사(Nyssa)의 그레고리우스(Gregorius, 3월 9일)와 세바스테(Sebaste)의 베드로(Petrus, 1월 9일)이며 모두 성인품에 오른 분들입니다.
그는 카이사레아(Caesarea),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그리고 아테네(Athenae)의 학교에서 교육받았으며, 이곳에서 나지안주스(Nazianzus)의 그레고리우스와 깊은 우정을 맺습니다. 357년경에 그는 동방의 주요 수도원들을 방문하였으며, 358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 다음 네오카이사레아(Neocaesarea)의 이리스(Iris) 강변의 안네시에서 은수자로 정착합니다.
바실리우스는 불과 5년 동안을 그의 공동체와 생활했을 뿐인데도 동방 수도생활의 아버지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그는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와는 달리 법 제정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영향은 정교회 수도생활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주요한 원리로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사제로 서품 된 후 성 바실리우스는 365년부터 카이사레아 교구를 위하여 일했고, 370년에는 그곳의 주교로 선임되었습니다. 그는 또 아리우스파(Arianism) 황제인 발렌스(Valens)가 정통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때 용감히 맞서 싸웠으며 이 때문에 그는 지방 총독 앞에 끌려가서 자신을 변명하여야 했는데 바실리우스의 태도가 너무나 당당하였기 때문에 총독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고 합니다. 총독은 “아마도 당신 같은 주교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라고 했다고 하는데 이런 대화를 통해 그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으며, 그의 강직성 때문에 교황 성 다마수스(Damasus)와 서방 교회 간의 관계에는 어려움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는 병자와 가난한 사람을 구하는데 매우 적극적이었고, 요양원을 짓거나 혹은 대대적으로 진료사업을 펼쳤으며 설교가로도 명성을 얻었으며 아리우스파(Arianism)와의 투쟁을 계속하면서 동방 정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발렌스 황제가 전투에서 사망한 지 불과 한 달 만인 1월 1일 카이사레아에서 사망합니다.
바실리우스는 초대 교회의 큰 거인이었으며 비잔틴 제국에서 아리우스파를 몰아낸 것이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아리우스파를 단죄한 배경에는 바실리우스의 영향력이 대단히 컸음을 증명하고도 남습니다.
그가 네오카이사레아에서 제정한 규칙과 조직이 동방 수도생활의 기초가 되었고, 현재까지도 그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또한 바실리우스는 성직매매를 완강히 거절하였으며, 가뭄과 한 발의 희생자를 대대적으로 원조하였으며, 보다 훌륭한 성직자 양성을 도모하였고, 엄격한 성직자 법규를 주장하고, 과감하게 악습을 끊어버리면서, 카파도키아(Cappadocia)에서 만연된 매춘행위 관계자들을 파문하였습니다.
그는 유식하고 정치력도 있는 사람이면서 성덕이 뛰어났으며, 그리스도교회의 가장 위대한 설교가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며 그의 해박한 저서들과 4백여 통의 편지들은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성령에 관한 저서와 에우노미우스를 반박하는 세 권의 저서, 그리고 그레고리우스 나지안주스와 함께 편집한 “필로칼리아”가 그중에서도 매우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교회학자이며 동방 수도자의 아버지로 큰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바실리오(Basil) 축일 1. (1-6) _ 1월 1일, 3월 6일, 3월 7일, 3월 22일, 3월 26일, 5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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