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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이야기/세례명 이야기

루치아(루시아, Lucy) 축일 3.(9-10) - 9월 20일, 5월 29일(국내)

 

루치아(루시아, Lucy)

 

9. 9월 20일 성녀 박희순 루치아 (朴喜順 Lu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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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박희순 루치아(9월 20일)

신분 : 동정 궁녀, 순교자

활동지역 : 한국(Korea)

활동연도 : 1801-1839년

같은이름 : 박루치아, 박 루치아, 박루시아, 박 루시아, 루시, 루시아, 루치아

 

부유한 어느 외교인 집안에서 태어난 성녀 박희순 루치아(Lucia)는 어려서부터 타고난 육체의 아름다움과 솔직하고 총명하며 상냥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으며 이에 궁중에 불려 들어가 왕후의 시녀가 되었습니다. 어린 순조 임금이 15세가 채 못 되었을 때 그녀의 매력에 몹시 끌려 유혹하려고 하였으나 박희순 루치아는 비상한 지혜와 용기로 그 유혹을 물리쳐 궁중에 이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한문과 국문이 능했던 그녀는 순조의 차녀인 복온 공주에게 글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30세쯤 되었을 때 루치아는 천주교 이야기를 듣고 곧 믿기 시작하였지만 궁중에 매인 몸일 뿐 아니라, 다른 궁녀들을 보살피는 상궁의 자리에 있었고 김 대비의 총애를 받았으며 선왕의 위패를 지키는 소임을 맡았기에 궁궐을 빠져나오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으로 인해 병을 빙자하여 궁중에서 나오게 되고 천주교를 대단히 싫어하는 아버지 때문에 남대문 밖의 조카 집에 가서 살게 됩니다. 이때부터 루치아는 사치와 환락 속에서 허송한 세월을 후회하며 더욱 열심히 교리를 배우고 본분을 철저히 지키는 데 배로 열심이었으며 특별히 옷과 음식에 있어서 많은 극기를 행하였습니다. 그녀는 오래지 않아 조카의 가족을 입교시켰습니다.

 

박해가 일어난 1839년 서울의 큰살리뭇골이라는 동네에 집을 한 채 장만한 그녀는 전 아가타(Agatha)와 몇몇 여신자와 함께 살게 되는데 그들이 박해를 피할 방도를 의논하고 있던 4월 15일 포졸들이 급습하고 루치아는 태연히 “이는 천주의 성의이다.” 하고 이야기한 후 모두 떠날 준비를 하라고 집안에 있는 식구들에게 이른 후 포졸들에게 술과 안주를 내다 대접한 후 옥으로 끌려가게 되고 모두가 며칠간 매우 혹독한 고문을 받게 됩니다. 

 

오래지 않아 다른 사람들은 배교하게 되고 전 아가타와 박 루치아만이 꿋꿋하게 견디다가 형조로 이송되었는데 여기서 세 번 출두하여 그때마다 곤장을 30대씩을 맞지만 , “이제야 오주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괴로움이 어떠하였는지 조금 깨닫게 되었다”라고 태연하게 말하여 이를 본 사람들은 모두 이상히 여겼으며 형관은 그것을 마술로 돌렸다고 합니다.

 

“박녀(朴女) 희순은 신자들과 긴밀히 결합하여 밤낮으로 사도에 빠져 있으며, 그의 행동과 언어와 침묵까지도 요술과 마술뿐이요, 입으로 외는 것이나 손으로 표시하는 것이 하나도 사특한 저주 아님이 없는지라, 이에 확증을 얻어 사형을 선고하였으니 재가하심을 청하나이다.” 하는 주청을 형조에서 5월 12일 보냈고, 박 루치아는 서소문 밖에서 다른 8명의 신자와 함께 39세의 나이로 순교하였습니다.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1925년 7월 5일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10. 5월 29일 복녀 윤운혜 루치아 (尹雲惠 Lu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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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운혜 루치아(5월29일)

신분 : 양반, 부인, 순교자

활동지역 : 한국(Korea)

활동연도 : ?-1801년

같은이름 : 윤루치아, 윤 루치아, 루시, 루시아, 루씨아, 루키아

 

경기도에서 태어나 양근의 한감개(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살았던 윤운혜(尹雲惠) 루치아(Lucia)는 일찍이 어머니 이씨(李氏)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습니다. 그의 남편은 1801년에 순교한 정광수 바르나바이며 그의 언니는 윤점혜 아가타입니다.

 

나이가 차자 여주에 사는 정 바르나바와 혼인한 윤 루치아는 비신자였던 시부모의 반대로 혼인 문서를 주고받을 수 없었으며 조상의 제사에 시부모가 참여하도록 강요할 때마다 ‘교회에서 금하는 일이기 때문에 제사에 참여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이를 거부하였고 결국 1799년 남편과 함께 한양의 벽동으로 부모의 곁을 떠나 이주하게 됩니다.

 

윤 루치아 부부는 한양으로 이주한 뒤부터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면서 교회 일을 돕기 시작하였으며 자기 집 마당 한편에 따로 집회소를 짓고,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모셔다 미사를 봉헌하였으며, 교우들의 모임 장소로 그 집회소를 제공하였습니다. 강완숙 골롬바, 김계완 시몬, 정복혜 칸디다, 홍익만 안토니오, 홍필주 필립보 등이 이때 그곳에 자주 모이던 교우들입니다. 

 

전교에도 힘쓴 윤 루치아 부부는 어느 누구보다 많은 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쳤으며 예수님과 성모님의 상본을 그리거나 나무로 묵주를 제작하였고 교회 서적들을 베껴 교우들에게 팔거나 나누어 주었습니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언니 윤점혜 아가타가 체포되었고 자기 부부도 머지않아 체포될 것이라고 생각한 윤 루치아는 남편 정 바르나바를 피신시킨 다음, 성물들과 교회 서적들을 다른 교우의 집으로 옮겨다 숨겨 놓은 후 혼자 남아 집을 지키다가 그해 2월에 체포되었습니다.

 

포도청과 형조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며 신문을 받았지만 조금도 굴하지 않은 윤 루치아는 이미 밝혀진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발설하지 않았고 배교도 거부하였습니다. 박해자들은 더 이상 윤 루치아를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사형을 선고하였고, 윤 루치아는 5월 14일(음력 4월 2일) 서소문 밖 형장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당시 윤운혜 루치아에게 형조에서 내린 사형 선고문 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너는 남편을 도와 함께 행동하였으며, 시댁의 제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천주교 신자들과 이웃을 삼아 서로 교류하였고, 여성 교우들과 밤낮으로 얽혀 지냈으며, 교회 서적과 성화 · 성물들을 비밀리에 제작하여 이곳저곳으로 가지고 다니며 팔았다. 여러 사람을 유혹해 들여 온, 세상을 어지럽힌 죄는 만 번 죽어도 아쉽지 않다.”

 

윤운혜 루치아는  2014년 8월 16일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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