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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이야기/세례명 이야기

클라라(Clare) 축일 1.(1-2) - 2월 10일, 8월 11일

 

클라라(Clare)

같은이름 : 글라라, 끼아라, 클레어, 키아라

 

클라라(Clare)는 여성분들이 많이 사용하는 세례명으로 글라라, 클레어 등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1. 2월 10일 복녀 클라라

신분 : 과부

활동지역 : 리미니(Rimini)

활동연도 : 1282-1346년경

 

클라라 아골란티(Clara Agolanti)는 이탈리아 리미니의 부유한 집안의 딸로 태어나 어려서 결혼하였으나 곧 과부가 되었습니다. 남편 집안의 반대자들에 의해 얼마동안 유배생활을 하다가 다시 부친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그녀는 조심성이 없으며 충동적으로 살았기에 많은 빈축을 샀다고 합니다. 그녀는 30세가 되던 해의 어느 날 프란치스코회의 어느 성당에 갔다가 “클라라야, 아무런 잡념 없이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 한 번만 바쳐보아라."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녀는 이때부터 아주 신중하게 처신하였고 얼마 후에는 같은 성당에서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합니다. 그녀는 큰 충격을 받고 완전히 개심하였고 작은 형제회의 제3회에 입회하여 보속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녀는 온갖 보석으로 치장하던 여자였으나 고행복을 입고 철저한 고행을 시작하였는데 지난날의 허영과 육욕을 벌하기 위해 허름한 널빤지 위에서 스스로 잠을 잤고, 자신의 입맛을 희생하였습니다. 가끔 기아 직전까지 갈 정도로 음식을 절제하였으며 그녀의 지도하에 몇몇 부인들이 재속 수도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엄격한 그녀의 행동 때문에 반대자들도 생겼지만 그녀는 주님의 목마름을 실감하기 위해 물도 먹지 않고 오랫동안 지내기도 하였고 모두가 정말 놀라운 사람이라고 혀를 내둘렀다고 합니다. 그녀의 이러한 수덕생활은 그녀가 죽으면서 바로 성녀로 공경을 받는 놀라운 빛을 발하게 하였으며 1784년 교황 비오 6세(Pius VI)는 그녀에 대한 공경을 승인하였고 재속 수도자의 앞길을 밝힌 사람으로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2. 8월 11일 성녀 클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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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클라라(8월 11일)

신분 : 설립자, 수녀원장

활동지역 : 아시시(Assisi)

활동연도 : 1194-1253년

 

이탈리아 아시시의 귀족인 파바로네(Favarone)와 오르톨라나(Ortolana) 사이의 장녀로 태어난 성녀 클라라(Clara)는 어머니가 기도 중에 세상을 밝게 비출 빛을 낳으리라는 약속을 받고 ‘빛’이란 뜻을 지닌 클라라로 아기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성녀 클라라는 귀족 집안의 장녀이며 용모가 뛰어났기에 일찍부터 좋은 혼처를 찾아 결혼시키고자 하는 부모의 큰 기대를 받았지만 이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의 설교에 감명을 받은 그녀는 하느님께 수도자로서 온전히 자신을 바치려고 결심하였는데 이러한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는 어려웠습니다. 1212년 성녀 클라라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밤에 부모 몰래 집을 빠져나와서 성 프란치스코로부터 포르치운쿨라(Portiuncula) 성당에서 수도복을 받고 그의 첫 여성 동료가 되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당시 아직 여성을 위한 수도원을 세우지 않았기에 바스티아(Bastia) 근방의 베네딕토 수녀원에 일단 머물도록 해주었고 그녀의 부모는 강제로라도 집으로 그녀를 데려가려고 친구들과 친척을 동원해 수녀원을 찾았지만, 삭발한 머리를 보여주며 뜻을 끝까지 굽히지 않는 성녀 클라라를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 그녀는 그 후 산탄젤로 디 판초(Sant’Angelo di Panzo)의 베네딕토 수녀원으로 옮기게 되었고 얼마 후에는 그녀의 여동생인 아녜스(Agnes)마저 오게 되어 함께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녀의 부모는 강제로 아녜스만이라도 집으로 데려가려고 12명의 무장한 장정들을 보냈지만 성녀 클라라의 간절한 기도로 결국은 아무도 데려갈 수 없었습니다.

 

 

어렵게 모인 성녀 클라라와 몇 명의 자매들을 중심으로 성 프란치스코는 공동체를 형성하고, 모원(母院)으로 산 다미아노(San Damiano) 성당을 정해주었고 그들을 위한 생활양식과 규칙을 작성해 주었고 이로써 복음적 가난과 기도의 삶으로써 교회의 복음 선포를 지원할 ‘가난한 자매들의 수도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영국에서 작은 수녀회(Minoresses)로 불리기도 했던 이 수도회는 현재는 클라라 수도회로 불립니다. 성녀 클라라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로부터 1216년 ‘가난의 특전’을 얻었는데, 이는 어떠한 소유권이나 재산도 가지지 않고 전적으로 하느님과 애긍에 의존해 살아도 좋다는 허락입니다. 이 특전을 유지하고자 늘 고심했던 성녀 클라라는 교황이나 다른 성직자들이 오히려 수녀들의 규칙이 너무 엄격하다고 반대를 해 곤경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클라라 수도회의 수녀들은 그 어느 수도회보다도 엄격하고 가난한 생활을 실천하였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뜻이 담긴 클라라 수도회의 회칙은 그 엄격성 때문에 매우 논란이 많았고 그녀가 운명하기 이틀 전에야 겨우 승인을 받게 되었습니다.

 

높은 수준의 관상가들이었던 성녀 클라라를 비롯한 동료들은 ‘복음적 완덕의 가장 완전한 표현’이 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으며 성녀 클라라는 특히 40여 년 동안 공동체를 지도하면서 어진 어머니, 다정한 자매로서 늘 자매들의 뜻을 경청하며 겸손하게 봉사하였습니다. 주님의 가난을 실천하며 마치 성모 마리아처럼 살았던 그녀의 삶에 많은 이들이 감동하였고 그녀에게 기도와 자문을 얻으려고 찾아왔는데 그중에는 성 프란치스코와 작은 형제회 회원들뿐만 아니라 교황과 추기경 그리고 왕과 귀족들도 있었습니다. 

 

많은 기적으로도 유명한 성녀 클라라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와 동맹을 맺은 사라센의 대군이 1240년과 1241년에 아시시에 쳐들어왔을 때, 그녀는 부축이 없이는 일어설 수 없을 정도의 심한 병중이었지만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께 의지하며 성광을 들고 무방비 상태에 놓인 아시시 시민과 수도 가족을 구하기 위해 봉쇄구역까지 밀어닥친 적군들을 향해 나섰고 그녀가 기도를 마치자 성광에서 강한 빛이 나갔고 사라센군들이 눈이 부셔 겁을 먹고 도망침으로써 수녀원과 도시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50여 명의 수녀가 먹기 충분할 만큼 작은 빵 하나를 불어나게 했고, 기도와 축복으로 무수한 중환자를 치유하였습니다. 성녀 클라라는 1252년 주님 성탄 대축일 전야에 중병으로 누워있었는데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고 싶은 열망에 2km나 떨어진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의 밤미사에 병실을 떠나지 않고도 참여할 수 있었는데 이 기적으로 인해 교황 비오 12세(Pius XII)는 성녀 클라라를 텔레비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습니다.

 

엄격성에도 불구하고 급속도로 클라라 수도회는 이탈리아 전역과 프랑스, 독일 등지로 퍼져나갔는데 42년의 수도 생활을 대부분을 병상에서 보내야 할 만큼 성녀 클라라는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봉쇄구역 안에서 오로지 기도에 의지하면서 이 모든 일을 이루어냈습니다. 1253년 8월 11일, “저를 지어내시어 이 삶으로 부르셨으니 주님, 찬미 받으옵소서.”라는 찬가를 부르면서 성녀 클라라는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선종 2년 만인 1255년 그녀는 교황 알렉산데르 4세(Alexander IV)에 의해 곧바로 성인품에 올랐으며 교황 알렉산데르 4세는 “클라라는 숨어 살았지만 그 생애는 모든 이에게 알려졌고, 침묵하였으나 그 명성은 세상 끝까지 자자했다. 봉쇄 담장 안에 자신을 숨겼으나 곳곳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게 됐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녀의 유해가 안치된 아시시의 성녀 클라라 대성당과 성녀의 삶이 묻어 있는 산다미아노 성당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순례자를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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