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아나 (Juliana)
같은이름 : 율리안나, 줄리아나, 쥴리아나
1. 2월 7일 성녀 율리아나
신분 : 과부
활동지역 : 볼로냐(Bologna)
활동연도 : +435년
성녀 율리아나의 신심과 애덕을 이탈리아 밀라노(Milano)의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 12월 7일)는 높이 칭찬하였습니다. 사제가 되려는 남편을 위해 서로 합의하에 헤어진 성녀 율리아나는 그 후 네 명의 자녀들을 헌신적으로 양육하였으며 가난한 사람들과 교회를 섬기며 살았습니다.
2. 2월 16일 성녀 율리아나
신분 :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 니코메디아(Nicomedia)
활동연도 +305년
성녀 율리아나는 소아시아 니코메디아 출신으로 아버지 아프리카누스(Africanus)에 의해 소녀였을 때 이교도 청년인 에빌라수스(Evilasus)와 결혼할 것을 강요당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고 이로 인해 아버지에게 모진 매를 맞았으며 이로 인해 그녀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에빌라수스가 그 마을의 집정관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체포되었고 갖은 형벌을 받게 됩니다. 그녀는 결국 청혼자에 의해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아버지와 청혼자의 뜻대로 결혼하도록 그녀를 설득하려는 악마와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고도 전해집니다.
로마 순교록(Martyrologium Romanum)은 성녀 율리아나가 니코메디아에서 순교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그녀는 이탈리아 남부의 나폴리(Napoli)에서 서쪽으로 약 25km 떨어진 쿠마(Cuma)라는 마을에서 순교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래서 성녀 율리아나는 쿠마의 성녀 율리아나 또는 니코메디아의 성녀 율리아나로 불립니다. 그녀가 순교한 후 그녀의 유해는 한 귀족 신자에 의해 나폴리 인근 포추올리(Pozzuoli)로 옮겨졌다가, 롬바르드족으로부터 유해를 지키기 위해 568년 다시 쿠마로 옮겨졌습니다. 중세 시대에 그녀의 수난기는 널리 알려졌으며 교황 성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에 의해 특별히 나폴리에 성녀를 기리는 성역이 조성되었습니다. 성녀의 유해는 1207년 나폴리로 장엄한 예식을 통해 이장되었고 이때 나폴리 왕국 전체와 이탈리아와 에스파냐, 프랑스 등의 여러 지역으로 그녀에 대한 공경이 확산하였습니다.
3. 3월 20일 성녀 율리아나
신분 : 순교자
활동연도 : +300년
성녀 율리아나는 성녀 데르푸타(Derphuta), 성녀 마트로나(Matrona), 성녀 알렉산드라(Alexandra), 성녀 에우프라시아(Euphrasia), 성녀 에우페미아(Euphemia), 성녀 클라우디아(Claudia), 성녀 테오도시아(Theodosia)는 모두 파플라고니아(Paphlagonia) 지방 아미수스(Amisus)의 여성 그리스도인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 화형을 당해 순교하였습니다.
4. 4월 5일 성녀 율리아나
신분 : 신비가, 수녀
활동지역 : 코르닐롱산(Mount Cornillon)
활동연도 : 1191/2-1258년
그녀의 쌍둥이 자매인 아녜스(Agnes)와 함께 벨기에 플랑드르(Flandre) 지방 리에주(Liege) 교외의 레틴느(Retinnes)에서 태어난 성녀 율리아나는 다섯 살 때 고아가 되었고 이에 고향 인근인 코르닐롱산에 새로 설립된 시설에서 수녀들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하였습니다. 성녀 율리아나는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기도와 봉헌 생활을 접하였고 수녀들의 봉사활동을 거들며 가난한 사람들과 환자를 돌보았고 13살에 수녀원에 입회하게 됩니다. 그녀는 일찍부터 성체 신심이 깊었기에 10대 때에 이미 기도 중에 여러 차례의 성체 환시를 경험하였는데 반복되는 환시를 통해 전례 중에 교회의 생명과도 같은 성체를 공경하고 현양하는 축일이 없음을 일깨워주셨음을 깨닫고 성체 축일 제정을 원했으나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에 조용히 때를 기다렸습니다.
성녀 율리아나는 1225년에 수녀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그 후 자신의 환시 내용을 기초로 조심스럽게 성체 축일을 만들려는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자신의 고해 사제에게 환시 사실을 먼저 고백한 후 여러 신학자와 주교들과 접촉하며 환시의 진실성을 확인해 갔는데 그러면서 그녀는 이런저런 오해를 받기도 하고 제재를 당하기도 했지만, 리에주의 주교에 의해 마침내 교구 내에서 처음으로 1246년 ‘주님의 성체 성혈 축일’을 제정하여 전례 중에 기념하였습니다. 그러나 리에주의 주교가 그해 말 선종하면서 그녀의 사도직 활동도 순탄하지 않았는데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수도 규칙을 도입해 그녀는 엄격한 규율을 되살리고자 하였으나 성직매매로 사제가 된 한 성직자의 모함으로 수녀원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그녀가 살던 리에주 지역은 교황파와 황제파로 나뉘어져 있었고 이로 인해 종교적 · 정치적으로 갈등이 극심하였는데 이에 그녀는 일단 다른 지역으로 피신하여 지내면서 모든 상황을 기도로 용서하고 참아냈습니다. 그 후 지인의 도움으로 나무르(Namur) 지역의 시토회 수도원에 피난처를 마련한 그녀는 여생을 은수자로 살면서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축일 제정과 보급을 위해 애썼으며 성체 신심을 현양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머물렀던 포세스라빌(Fosses-la-Ville)에서 1258년 4월 5일 평화로이 선종하였습니다.
그녀가 선종한 후 1261년에 교황으로 선출된 우르바누스 4세(Urbanus IV)는 그녀와 같은 성체 환시를 체험하였는데 당시 몇몇 나라에서 지켜오던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축일을 보편교회 전례 안에서 기념하고자 하였고 당대 석학들에게 성무일도와 미사 전례문에서 사용할 성체 찬미가 작성을 맡겼습니다. 그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월 28일)의 성체 찬미가를 선택하여 1264년 보편교회 전례 안에서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축일’을 지내도록 선포하였습니다.
1869년 교황 복자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1996년 5월 28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제정 750주년을 기념하는 서한에서 성녀 율리아나에 대해 언급하였고, 2010년 11월 17일 일반알현에서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는 성녀 율리아나의 삶과 성체 성혈 축일 제정에 이바지한 공로에 대해 칭송하였습니다. 그녀는 리에주의 성녀 율리아나(St. Juliana of Liege)로도 불리고 있으며 그녀의 축일은 4월 6일에 기념하기도 하며 리에주 교구에서는 8월 7일에 더 성대히 기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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