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리노 (Cyrinus)
같은이름 : 치리누스, 키리노, 키리누스
치리노는 흔한 세례명이 아니라 흔하지 않고 유니크한 세례명을 찾고 있는 분들이 선택하시기 좋을 듯합니다.
1. 1월 3일 성인 치리노
신분 : 순교자
활동연도 : +320년
성 치리노와 성 프리무스(Primus), 성 테오게네스(Theogenes)는 리키니우스 황제 때 헬레스폰트(Hellespont)의 키지쿠스(Cyzicus)에서 순교한 황제의 군인들입니다.
2. 4월 26일 성인 치리노
신분 : 순교자
활동연도 : +304년
교황 성 카이우스(Caius, 4월 22일)를 계승하여 296년에 로마(Roma)의 주교인 교황좌에 올랐던 성 마르첼리누스(Marcellinus)의 생애나 재임 기간 등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연대 교황표”(Liber Pontificalis)에 따르면 프로젝투스(Projectus)의 아들인 그는 로마인이며 순교하지는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로마에서 303년 시작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를 받지 않고 선종하였고 로마의 비아 살라리아(Via Salaria)에 있는 성녀 프리스킬라(Priscilla) 카타콤바에 사제 마르첼루스(Marcellus)에 의해 묻혔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100년 정도 지난 후인 4세기 초 박해 시기에 교황 성 마르첼리누스가 일시적으로 배교를 했고, 박해자에게 성경을 넘겨주었다는 악의적 주장이 주로 도나투스파(Donatismus) 이단 신봉자들에 의해 퍼뜨려지게 되는데 히포(Hippo)의 주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8월 28일)는 이러한 주장이 잘못된 중상모략임을 강력히 피력하였으며 교회사가인 에우세비우스(Eusebius) 역시 그를 ‘박해를 극복한 교황’이라고 하였으며 키프로스의 주교인 테오도레트(Theodoret)는 박해 중에도 그는 매우 훌륭한 역할을 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교황 성 마르첼리누스의 배교 주장을 오늘날의 많은 학자들은 근거 없는 거짓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로마 순교록”(Martyrologium Romanum)은 4월 26일 목록에서 또 다른 전승을 전해주고 있는데 교황 성 마르첼리누스가 로마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때문에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참수형을 선고받고 성 치리노, 성 클라우디우스(Claudius), 성 안토니누스(Antoninus)와 함께 순교했다는 것입니다. 연대 교황표에 따르면 그는 4월 1일 순교한 후 25일이 지난 4월 26일에 비아 살라리아에 있는 성녀 프리스킬라 카타콤바에 안장되었다고 하며 이와는 달리 “리베리오 교황표”(Catalogus Liberianus)는 순교일을 10월 25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0월 25일에 성인의 두 번째 축일을 기념하기도 합니다.
3. 5월 10일 성인 치리노
신분 : 순교자
활동지역 : 렌티니(Lentini)
활동연도 : +251년
성 치리노, 성 알피우스(Alphius)와 성 필라델푸스(Philadelphus) 형제 순교자들은 시칠리아(Sicilia) 섬의 오트란토(Otranto) 교구와 렌티니 교구의 수호성인입니다. 이 세 순교자는 시칠리아 출신으로 그들의 자매인 베네딕타(Benedicta)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데키우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로마(Roma)로 끌려가서 갖은 고문을 받았으며 그 후 나폴리(Napoli) 근방의 포추올리(Pozzuoli)에서 몇 사람이 순교하였고 이들 형제와 나머지 사람들은 다시 시칠리아로 끌려오게 됩니다. 그들의 조리 있는 설명과 투철한 신앙정신으로 20명의 군인을 비롯한 수많은 개종자들이 나왔으며 성 알피우스는 이때 22세였는데 혀가 잘리는 등의 고문을 받고 순교하였습니다. 성 필라델푸스는 21세였는데 구워 죽이는 형을 받았고, 19세의 성 치리노는 기름에 튀기는 형을 받아 순교하였습니다.
4. 6월 12일 성인 치리노
신분 : 군인, 순교자
활동연도 : +4세기초?
성 치리노, 성 바실리데(Basilides), 성 나보르(Nabor), 성 나자리우스(Nazarius)의 행적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습니다. 옛 “로마 순교록”은 6월 12일 목록에서 그들을 아우렐리아누스 가도(Via Aurelianus)에 묻혀 있는 로마에서 순교한 거룩한 군인 순교자들이라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데키우스 황제 때로 나오기도 함)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아우렐리우스가 로마의 총독으로 있을 때 체포된 그들은 이교도 신전의 우상에 희생 제물 바치기를 거부하며 그리스도에 대한 굳은 믿음을 고백하고 감옥에 갇혔으며 감옥에서 모진 매를 맞고 결국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들의 시신을 군인들이 들짐승의 먹이로 던져 주었으나 짐승은 그들에게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았으며 그리스도인들이 나중에 그들을 정성껏 수습해서 묻어주었다고 합니다.
성 바실리데는 세 명의 로마 순교자 명단에 나중에 추가된 것인데 로마 전례서로는 가장 오래된 책인 8세기의 “젤라시우스 전례서”(Sacramentarium Gelasianum)에 세 명의 로마 군인 순교자들은 이미 언급되어 있지만 순교 일자와 경위에 대한 설명은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로마에서 순교한 이 네 명의 군인 순교자들은 6월 12일 전례력 안에서 오랫동안 함께 기념하였지만 순교록의 불확실성 등의 이유로 그들은 1969년 전례 개혁과 함께 로마 보편 전례력에서 삭제되었습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6월 12일 목록에서 아우렐리아누스 가도에서 12마일 떨어진 로리(Lori)에 묻힌 성 바실리데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있으며 세 명의 나머지 순교자들의 이름을 더는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