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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이야기/세례명 이야기

엘리사벳(Elizabeth) 축일 1.(1-2) - 6월 18일, 7월 4일

 

엘리사벳(Elizabeth)

같은이름 : 엘리자벳, 엘리자베스,엘리제, 엘라, 이사벨, 이사벨라

 

1. 6월 18일 성녀 엘리사벳

신분 : 수녀원장

활동지역 : 쇼나우(Schonaw)

활동연도 : 1129-1164년

 

성녀 엘리사벳은 독일 본(Bonn) 근교의 쇼나우의 베네딕토 수도원에 12세에 입회하여 1147년에 서원을 하였습니다. 엄격한 수덕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1152년경에  첫 번째 환시를 보게 되는데 그 후 일생동안 수많은 초자연적 현상, 곧 환시, 탈혼, 예언 등을 하였지만 가끔은 그녀의 몸에 타박상을 내고 때리는 악마적인 환시도 있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이러한 자신의 환시, 특히 주님의 수난과 부활 그리고 승천에 대한 환시를 묘사하였는데, 그녀의 남동생인 에그베르투스(Egbertus)가 이를 처음으로 기록하였는데 그 역시 쇼나우 수도원에서 수도자가 되었다가 후일 그곳의 원장을 역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녀의 책에 기록된 이러한 환시의 내용 중에는 분명치 못한 내용도 있고 학자들로부터 의문시되는 부분도 있는데 그녀의 동생의 친구이던 대립교황 빅토르 4세(Victor IV)를 지지한 것 등이 그 예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진실에 대한 의구심은 추호도 없고 높은 존경과 사랑을 받아왔으며 그녀는 1157년에 원장이 되었고 그로부터 7년 후에 운명하였습니다. 그녀에 대한 공식적인 시복이나 시성에 대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지만 로마 순교록은 그녀를 성녀 엘리사벳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2. 7월 4일 성녀 엘리사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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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엘리사벳(7월 4일)

신분 : 여왕, 3회원

활동지역 : 포르투갈(Portugal)

활동연도 :1271-1336년

 

에스파냐 아라곤(Aragun)의 왕 페드로 3세(Pedro III)와 시칠리아(Sicilia)의 왕 만프레디(Manfredi)의 딸인 콘스탄스(Constance) 사이에서 태어난 성녀 엘리사벳에게 아버지인 페드로 3세 왕은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헌신하였던 그녀의 고모할머니를 본받으라고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11월 17일)과 같은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성녀 엘리사벳은 12세라는 어린 나이에 포르투갈의 왕 데니스 1세(Denis 또는 Dinis I)와 결혼하였는데 오랫동안 자녀를 낳지 못하다가 후에 남매를 얻었는데 아들은 포르투갈의 왕위를 승계해 아폰수 4세(Afonso IV)가 되었고 딸 콘스탄스는 카스티야(Castilla)의 왕인 페르난도 4세(Fernando IV)와 결혼하여 왕비가 되었습니다.

 

능력 있는 강한 통치자였던 데니스 1세 왕은 남편으로서는 칭찬받지 못할 사람이었는데 이러한 남편의 불신을 감내하며 성녀 엘리사벳은 자신이 낳지 않은 서자들의 교육까지 담당하였으며 그러면서도 기도와 경건한 삶을 끊임없이 추구하며 병원 · 고아원 · 매춘 여성들의 보호소 · 양로원 등을 설립하는 등의 자선사업에도 힘썼으며 가난한 이들과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도 마련해 주었습니다. 남편의 냉대에도 인내심을 갖고 대했던 성녀 엘리사벳은 1297년 아들 아폰소 4세가 이복형제들에게 관대한 아버지의 행동에 분개했을 때 두 사람의 대립을 중재하고 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그녀의 노력과 정치적 영향력으로 인해 오해를 받아 알랑케(Alenquer)로 한때 추방되기도 합니다. 

 

그녀는 남편 데니스 1세가 1324년 병을 얻자 헌신적으로 간호해 주었는데 남편은 이러한 그녀의 정성에 감동하여 뒤늦게 회심하고 신앙을 찾았지만, 이듬해에 선종하고 말았습니다. 성녀 엘리사벳은 아들이 왕위를 승계한 후 남편으로부터 물려받은 많은 재산을 수도원 · 교회 · 빈민 구제소 등을 세우는데 아낌없이 쏟아부었으며 자신이 코임브라(Coimbra)에 세운 성녀 클라라(Clara)의 가난한 자매 수도회 근처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작은 형제회의 3 회원이 된 그녀는 수도자 못지않은 엄격한 보속의 생활과 봉사활동에 전념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말년에도 포르투갈과 카스티야의 전쟁을 막아내는 역할을 한 성녀 엘리사벳은 ‘평화와 중재의 사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는 아들인 아폰수 4세와 카스티야의 왕이자 자신의 조카인 알폰소 11세(Alfonso XI) 간의 평화를 중재하러 가던 1336년 7월 4일 도중에 도중 과로와 열병으로 병을 얻어 에스트레모스(Estremoz)에서 선종하였습니다. 그녀의 유해는 코임브라의 성녀 클라라의 가난한 자매 수도회 성당에 묻혔으며 두 왕은 후에 동맹을 맺었습니다.

 

교황 레오 10세(Leo X)에 의해 1516년 성녀 엘리사벳은 복녀로 선언되면서 코임브라 교구에서 공식적으로 공경 예절이 허락되었고,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1630년 “로마 순교록”에 7월 4일로 성녀 엘리사벳의 축일이 수록되어 있었으나, 교황 인노켄티우스 12세(Innocentius XII)에 의해 1695년 현재는 폐지된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8일 축제와 겹치는 관계로 7월 8일로 바꿨고 1969년 전례력 개정에 의해 선택 기념일로 변경되면서 7월 4일로 다시 축일이 복원되었습니다. 성녀 엘리사벳은 포르투갈 또는 아라곤의 이사벨라(Isabella, Isabel)로 알려져 있습니다.

 

평화와 중재의 사도답게 교회 미술에서 성녀 엘리사벳은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 또는 올리브 가지가 그려진 왕비의 옷을 입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또한 헝가리의 성녀인 엘리사벳과 마찬가지로 장미의 기적을 주제로 한 작품도 많이 있습니다. 14세기의 한 제대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어느 겨울 아침에 성을 나온 성녀 엣리사벳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동전(또는 빵)을 나누어주었는데, 무엇을 감싸고 있냐고 그녀와 마주친 왕이 묻자 ‘주님의 장미’라고 답했고, 풀어헤친 앞치마에는 1월임에도 불구하고 장미가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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