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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이야기/세례명 이야기

엘리사벳(Elizabeth) 축일 3.(5-7) - 11월 25일, 11월 9일, 9월 20일

 

엘리사벳(Elizabeth)

 

5. 11월 25일 복녀 엘리사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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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녀 엘리사벳(11월 25일)

신분 : 동정녀, 신비가

활동지역 : 로이테(Reute)

활동연도 : 1386-1420년

같은이름 : 엘리자벳, 엘리자베스, 엘리제, 엘라, 이사벨, 이사벨라

 

엘리사벳은 독일 뷔르템베르크(Wurrttemberg)의 발트제(Waldsee)에서 태어나 요한과 안나라 부르는 가난한 부모 밑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천진난만하고 부드러운 천성이 두드러졌던 그녀는 어릴 때부터 ‘착한 베시’로 알려졌는데 14세 되던 해부터 고해신부인 콘라두스(Conradus)가 그녀의 생활을 지도하며 그녀가 작은 형제회 재속 3 회원이 되도록 추천하였습니다. 그녀는 17세에 베를 짜는 어느 부인과 로이테에서 공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콘라두스 신부의 도움으로 인하여 이 작은 공동체는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작은 공동체에서 평생을 지낸 엘리사벳은 중세의 신비가 중 한 사람이었고, 극도의 엄격한 생활과 환시 등으로 인해 매우 성덕이 높았음이 입증되었으며 특히 수난받으신 주님의 오상을 받은 엘리사벳은 가시관을 쓴 흔적이 뚜렷하고 매 맞은 자국이 선명하였으며 주님 수난 성금요일과 사순시기 동안에는 선혈이 낭자했으며 그에 따른 고통 역시 극심했다고 전해집니다. 교황 클레멘스 13세(Clemens XIII)에 의해 1766년 그녀에 대한 공경이 승인되었습니다.

 

6. 11월 9일 성녀 엘리사벳(삼위일체의) (Elizabeth of the Trinity) 

신분 : 수녀, 신비가

활동연도 : 1880-1906년

같은이름 : 엘리자벳, 엘리자베스, 엘리제, 엘라, 이사벨, 이사벨라

 

1880년 7월 18일 프랑스의 부르주(Bourges) 근처에서 태어난 삼위일체의 성녀 엘리사벳(Elisabeth)은 육군 장교였던 아버지를 4세 때 여의고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Theresia ab Avila, 10월 15일)의 저서에 심취할 만큼 열심한 신자였던 어머니에게 충실한 신앙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습니다. 성녀 엘리사벳은 14세에 동정녀가 될 것을 서약하고 디종(Dijon)의 카르멜 수도회에 입회하였고 1903년 첫 서원을 하였습니다. 또한 1904 11월에는 “삼위일체께 바치는 기도”라는 기도문을 작성하기도 합니다. 1905년 부활절을 앞두고 엘라사벳은 사도 바오로(Paulus) 안에서 삼위일체의 영광을 찬미하는 자신의 성소를 발견하는 영적 체험을 하게 되며 이듬해의 주님 승천 대축일과 그로부터 얼마 후에는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영적인 은총을 체험하였습니다. 약 9개월 동안 병상에 누워 고통스러운 병고를 치르던 성녀 엘리사벳은 디종 수녀원에서 1906년 11월 9일 선종하였습니다. 그녀는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1984년 11월 25일 시복되었으며 프란치스코(Franciscus) 교황에 의해 2016년 10월 16일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3. 9월 20일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 (丁情惠 Elizabeth)

신분 :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 한국(Korea)

활동연도 : 1797-1839년

같은이름 : 정 엘리사벳, 정엘리사벳, 엘리자벳, 엘리자베스, 엘리제, 엘라, 이사벨, 이사벨라

 

학문으로도 유명하며 한국 천주교회 설립자 중 한 명으로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순교한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딸인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Elisabeth)의 어머니는 유 체칠리아이며 그녀의 오빠는 최초의 신학생인 정하상 바오로(Paulus)입니다. 이들은 모두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하여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집안 전체가 열심한 신앙인이었기에 일찍부터 성교회의 진리를 몸에 익히며 성장한 그녀는 1801년 박해 때 아버지 정약종 아우구스티누스와 큰오빠인 복자 정철상 카롤루스(Carolus)가 순교하면서 어머니 유 체칠리아와 오라버니들과 같이 붙잡혀 들어가게 되지만 조정에서는 그들의 재산을 모두 몰수한 후 부인과 어린아이들은 놓아주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살 길이 막연하여 마재에 살던 시동생 정약용 요한의 집으로 가게 되지만 친척들의 냉대와 구박을 받으며 몹시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되고 정 엘리사벳 역시 어머니가 당하는 수많은 슬픔을 함께 나누며 살게 됩니다. 그러나 그녀는 가난과 추위와 굶주림을 이겨나가는데 익숙하였으며 계속 신앙을 지켜 나갔고, 바느질과 길쌈으로 어머니와 오빠 정하상 바오로의 뒷바라지를 하였습니다. 몇몇 친척들은 처음에는 천주교가 집안을 망쳐 놓았다고 적대시하였지만 곧 그녀의 아름다운 모범과 덕에 감화되어 천주교에 입교하게 됩니다.

 

주님께 동정을 허원하였던 그녀는 언제나 단정하게 지냈지만, 30세쯤에는 마음이 약해져 5년 이상 강한 유혹을 당하였고 이러한 유혹을 이기기 위해 기도와 단식과 편태를 사용한 그녀는 마침내 완전한 승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조선에 선교사 신부들이 오기를 절실히 원하였던 그녀는 그 뜻을 전심으로 주님께 청하였는데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와 두 명의 신부가 입국하자 자기 집으로 그들을 모시고 주밀하게 보살펴 드림으로써 하느님께 감사의 뜻을 표하였습니다. 앵베르 범 주교는 “엘리사벳은 참으로 여회장의 일을 볼만하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신앙과 신심을 가진 정 엘리사벳도 박해가 일어나자 무서움을 감추지 못하였는데 “내게는 과연 짐이 될까 봐 무섭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주교가 박해의 조짐을 알고 시골로 피신해 있는 동안 그녀의 어머니와 오빠, 그리고 정 엘리사벳은 옥에 갇힌 이들을 보살펴 주다가 결국 관헌에게 붙잡히게 됩니다. 

 

7회의 혹독한 고문과 곤장을 320대나 맞은 그녀는 잠시도 평온을 잃지 않았고 그를 이길 희망을 버린 관원은 10월 2일 형조로 보냈으며 그녀는 다시 형조에서 6회의 심문과 고문을 당한 후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정 엘리사벳은 형장으로 떠나면서도 신자들에게 “무엇보다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 많이 해 주세요.”라고 말하였으며 43세를 일기로 1839년 12월 29일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습니다.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1925년 7월 5일  시복되었고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1984년 5월 6일 시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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