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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이야기/세례명 이야기

가타리나(카타리나, Catherine) 축일 1.(1-2) - 2월 2일, 3월 9일

 

가타리나(카타리나, Catherine)

가타리나의 경우 카타리나로 더욱 많이 불리고 있고 여성분들이 많이 사용하는 세례명으로 여러 명의 성녀가 있고 축일도 매우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1. 2월 2일 성녀 가타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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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가타리나(2월 2일)

신분 : 수녀

활동지역 : 리치(Ricci)

활동연도 : 1522-1590년

같은이름 : 까따리나, 카타리나, 캐서린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 지방의 피렌체(Firenze)에서 태어나 알레산드라(Alessandra)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성녀 카타리나(Catharina de Ricci, 또는 가타리나)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었고 아버지에 의해 숙모가 수녀로 있는 집 근처의 베네딕토회 수녀원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성녀 카타리나는 어려서부터 신심이 깊었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수녀원에서 배운 대로 신앙생활을 충실히 실천해 나갔으며 특히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신심을 키워나갔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성녀 카타리나에게 부자 청년과 결혼할 것을 권하였지만 결국 아버지를 설득하여 토스카나 지방 프라토(Prato)에 있는 도미니코회 수녀원에 입회하였습니다.

 

수녀원에 입회하여 그녀는 수도명을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의 이름을 따 카타리나라는 수도명을 선택하였으며 엄격한 수련을 받게 됩니다. 입회 초기 그녀는 큰 병을 앓게 되지만 그 고통을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리스의 수난에 동참하기 위한 은총의 시련으로 받아들였고 완덕을 향한 모범적 생활로 많은 존경을 받았기에 젊어서부터 수녀원의 수련장과 원장직을 맡게 되었고 이를 훌륭히 수행하였습니다. 성녀 카타리나는 매 주일 같은 시간에 오랜 시간 탈혼 상태에 들어가곤 했는데, 이때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수난에 흠뻑 취하곤 하는 현상이 12년 동안이나 정기적으로 일어나는 등 장상의 직분을 사임한 후에도 많은 이들에게 놀라운 신앙 체험을 한 인물로 관심을 받았습니다.

 

교회 지도자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그녀의 의견을 듣기 위해 모여들 만큼 그녀의 영향력은 매우 컸으며 그녀는 늘 겸손함을 간직하고자 노력했기에 교회의 개혁 운동에도 최선을 다하였는데 후에 교황 성 비오 5세(Pius V, 4월 30일), 성 카롤루스 보로메오(Carolus Borromeo, 11월 4일)와 필리푸스 네리우스(Philippus Nerius, 5월 26일)와 함께 현대 교회의 개혁자로서 높은 칭송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1590년 2월 2일 오랜 투병 생활 끝에 수녀원에서 선종하였고 교황 클레멘스 12세(Clemens XII)에 의해 1732년 시복되었고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1746년 6월 29일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옛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리치의 성녀 카타리나는 병자들의 수호자로 선종일인 2월 2일이 아닌 2월 13일에 기념해 왔지만 1971년 전례력을 개혁하면서 2월 2일로 변경하였습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에서도 성녀 카타리나의 행적을 2월 2일 목록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날이 주님 봉헌 축일과 겹치는 관계로 도미니코회에서는 2월 4일로 축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2. 3월 9일 성녀 가타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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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카타리나(3월 9일)

신분 : 수녀원장

활동지역 : 볼로냐(Bologna)

활동연도 : 1413-1463년

같은이름 : 까따리나, 카타리나, 카테리나 데 비그리, 캐서린

 

1413년 9월 8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에 성녀 카타리나는 이탈리아의 볼로냐에서 귀족 가문의 딸로 태어났으며 카테리나 데 비그리(Caterina de Vigri)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아버지는 학식과 덕망을 두루 갖춘 법률가였으며 이러한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어려서부터 교육을 받고 자란 그녀는 페라라(Ferrara)의 후작인 니콜라우스 3세의 궁전에서 11세 때부터 후작 부인을 모시는 시녀로 일하며 훌륭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후작 부인의 딸인 엘리사벳과 함께 교육받으며 깊은 우정을 쌓은 그녀는 신심뿐만 아니라 음악과 미술, 라틴어와 필사 등에서도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선종하고 엘리사벳이 결혼하자 그녀는 궁전을 나와 1427년에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이미 그때 일생을 하느님께 바치려고 결심한 상태였기에 계속해서 들어오는 혼담을 모두 거절하였습니다.

 

그녀의 어머니에게 본인의 뜻대로 살 것을 허락받고 그녀는 페라라에서 수도자처럼 경건한 기도와 노동을 하며 살고자 하는 부인들과 함께 이미 그러한 삶을 살던 베긴회(Begines) 공동체에 합류하였습니다. 곧 고독과 신앙에 대한 의심 등 시련과 유혹을 겪기도 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에 의지해 그럴 때마다 극복해 나갔으며 그러한 경험을 토대로 다른 이들을 위한 소책자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녀의 겸손함과 경건함에 감동한 후작 부인의 도움으로  1431년 그녀는 페라라에 성 프란치스코의 규칙을 따르는 ‘성체의 가난한 클라라 수녀원’을 설립하여 수련장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명성이 계속해서 널리 알려지자 1456년에 새 수녀원을 볼로냐에 설립해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어 그녀는 페라라를 떠나 볼로냐로 가게 되고 12명의 동료와 함께 그곳에 같은 이름의 수녀원을 설립해 선종할 때까지 원장직을 수행하였습니다.

 

성녀 카타리나는 페라라에서 수도 생활을 시작한 이후부터 예수, 마리아, 요셉과 여러 성인에 대한 환시와 미래에 일어날 사건들에 대한 환시를 체험하였고 1445년 성탄절에 경험한 아기 예수님을 팔에 안은 마리아의 환시에 대한 자신의 체험을 글로 쓰기도 하였는데 이 환시는 그 후 많은 화가들이 즐겨 그리는 그림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유능한 수련장이며 원장이었던 그녀는 서도와 회화에서도 특별한 재능을 보였으고, 그녀의 뛰어난 성덕으로 인해 그녀의 수도원은 곧 유명해졌고 천상 은총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성녀 카타리나가 손수 장정하고 장식한 성무일도서는 볼로냐 수도원에 현재도 보관되어 있습니다. 또한 그녀는 1438년에 처음 저술하고 1450~1456년에 보완하여 증보판으로 낸 “일곱 가지 영적 무기”(The Seven Spiritual Weapons)에 하느님과 사탄에 대한 자신의 환시를 상세히 묘사하기도 하였습니다.

 

1463년 3월 9일 마지막으로 성체를 영한 성녀 카타리나는 볼로냐의 수녀원에서 선종해 그곳에 묻혔는데 18일 만에 그녀의 무덤과 부패하지 않은 시신에서 달콤한 향기가 나는 등의 기적이 일어났고 사람들은 그녀의 유해를 발굴해 수도복을 입고 의자에 앉은 자세로 수녀원 성당에 안치하였고 그녀의 유해는 오늘날까지 볼로냐에서 큰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녀는 예술가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으며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에 의해 1712년 5월 22일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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