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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이야기/세례명 이야기

가타리나(카타리나, Catherine) 축일 3.(6-9) - 5월 4일, 9월 4일, 9월 15일, 11월 25일

 

가타리나(카타리나, Catherine)

 

6. 5월 4일 복녀 가타리나 

신분 : 동정녀

활동지역 : 파르코담(Parc-aux-Dames)

활동연도 : +13세기경

같은이름 : 까따리나, 라헬, 카타리나, 캐서린

 

오늘날 벨기에의 루뱅(Louvain)에서 살았던 카타리나는 유대인의 딸이었으며 어려서부터 라헬이라고 불렸습니다. 가끔 그녀의 집에 브라반트(Brabant) 대공의 지도신부가 찾곤 하였는데 그와 함께 카타리나는 종교적인 주제에 대해 토론하기를 즐겼습니다. 그녀가 12세 되던 해에 그 사제로부터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겠냐는 질문을 받은 카타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하고 대답하였고 사제는 이때부터 그녀가 훌륭한 신앙을 갖추도록 가르쳤지만 이를 눈치챈 그녀의 부친이 그녀를 라인 강 넘어 먼 곳으로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성모님의 환시를 보게 되는데 그녀에게 성모님이 지팡이를 주며 도망가라고 알려주었고 즉시 그녀는 집을 빠져나와 사제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한 후 사제의 도움을 받아 시토회 수녀원에 입회하게 됩니다. 그녀는 고향에서 불과 2.4km 정도 떨어진 그곳에서 세례를 받고 카타리나라는 수도명을 받았으며 루뱅의 주교에게 그녀의 부친이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아무런 성과를 보지 못하였고 그는 다시 교황 호노리우스 3세(Honorius III)에게 간청하였습니다.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쾰른(Koln)의 대주교였던 엔겔베르투스에 의해 잘 수습되어 수도원에서 일생을 보내면서 훌륭한 수덕생활을 할 수 있었던 그녀는 환시와 기적 등으로 유명합니다.

 

7. 9월 4일 복녀 가타리나 (Catherine)

신분 : 동정녀

활동지역 : 라코니지(Racconigi)

활동연도 : 1486-1547년

같은이름 : 까따리나, 카타리나, 캐서린

 

가난한 노동자의 딸로 1486년 태어난 카타리나 마테이(Catharina Mattei)는 카타리나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낡아빠진 광에서 태어난 그녀는 그녀의 일생이 건강하지 못하고 물질적으로 궁핍하며 이해받지 못한 사람으로 살게 될 것임을 상징하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그녀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영적으로는 풍요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5살 때부터 이미 아기 예수님과 성모님께 대한 남다른 신심을 갖기 시작한 그녀는 집안에서 굶주림으로 인한 눈물을 흘리거나 힘든 일을 할 때마다 아기 예수님을 찾아가 큰 위로를 받곤 하였습니다.

 

그녀는 1500년의 성 스테파누스(Stephanus) 축일에 이 성인에게 기도하였는데, 성 스테파누스가 발현하여 그녀에게 성령께서 특별히 그녀를 보살펴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였으며 세 줄기의 빛이 그녀를 비추며, “나는 네 안에 내 거처를 정하고, 너의 영혼을 깨끗하고 밝게 할 것이며, 생기를 주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카타리나는 그 후 신비적인 신랑과의 동정 서원을 하였는데, 그녀의 손가락에는 이상하게도 신비스러운 반지가 끼워져 있었고, 그녀는 때부터 주님의 오상과 가시관의 아픔을 느끼게 되었지만 이것을 육안으로 볼 수는 없었습니다.

 

카타리나에게는 그 후에도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고 영적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자신을 짓누르는 악마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등 병고에 시달리기도 하였던 그녀는 카르마뇰라에서 62세에 운명합니다. 라코니지의 카타리나로 알려져 있기도 하며 교황 비오 7세(Pius VII)에 의해 1810년 그녀에 대한 공경이 승인되었습니다.

 

 

8. 9월 15일 성녀 가타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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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카타리나(9월 15일)

신분 : 과부, 신비가

활동지역 : 제노바(Genova)

활동연도 : 1447-1510년

같은이름 : 까따리나, 카타리나, 캐서린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성녀 카타리나는 지아코포 피에쉬(Giacopo Fieschi)와 프란체스카 디 네그로(Francesca di Negro)의 5명의 자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습니다. 언니가 아우구스티노회 수녀였기에 그녀는 어려서부터 수도생활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지만, 16세에 부모님의 염원으로 제노바 출신의 상류층 젊은이인 줄리아노 아도르노(Juliano Adorno)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녀의 남편은 신앙이 없었으며 낭비벽이 심했고 사나운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결혼 10년이 지나면서부터 그녀의 결혼생활은 남편의 방탕으로 인해 극도의 가난에 빠지게 되었고, 그녀는 심각한 우울증에 빠져 병상에서 힘겨운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1473년 고해성사를 하던 중 하느님의 자신을 향한 사랑을 강하게 느끼는 신비체험을 한 성녀 카타리나는 비슷한 시기에 회개를 경험한 남편과 환자들을 위해 제노바 병원에서 봉사를 시작합니다. 후일 남편은 프란치스코회 제3회 회원이 됩니다. 부부는 경제적으로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에 자신들을 제노바에서 큰 규모인 팜마토네(Pammatone) 병원에서 애덕을 실천하는 일에 봉헌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뛰어난 영성생활로 다른 이들의 주목을 끌기 시작한 성녀 카타리나는 1490년 병원장이 되기도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흑사병으로 거의 사경을 헤매게 되고 기적적으로 회복하게 되자 자신의 직책에서 사임합니다. 그리고 1년 뒤 남편도 세상을 떠납니다.

 

그녀는 그 후 자신이 경험했던 수많은 신비 체험에 대해 자신의 영적 지도자가 된 카타네오 마라보티(Cattaneo Marabotti) 신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병이 악화되어 고통을 받기도 하지만 그녀의 신심은 비범했으며 천상적 사물을 관상하는 뛰어난 영성가였던 그녀는 ‘악으로 서서히 물드는 세상의 오염’을 가장 두려워하였습니다. “영혼과 육신의 대화”, “영혼론”은 그녀의 가르침을 담은 책으로 신비신학 분야에서 유명한 저서가 되었으며 영국에서 1934년에 간행된 바 있습니다. 성녀 카타리나는 제노바에서 1510년 9월 15일 선종하였고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에 의해 1675년 시복되었고, 교황 클레멘스 12세에 의해 1737년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9. 11월 25일 성녀 가타리나

신분 :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활동연도 : +305년경

같은이름 : 까따리나, 카타리나, 캐서린

 

동방 교회에서 10세기경부터 많은 공경을 받아온 성녀 카타리나에 대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us I)가 6세기에 성녀 카타리나의 무덤 위에 그리스도의 거룩한 변모 기념 정교회 수도원을 세웠는데 이 수도원을 통해 그녀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전설적인 이야기에 따르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사는 부유한 로마인 가정에서 태어난 성녀 카타리나는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뛰어난 학식을 갖춘 미모의 처녀였는데 한 은수자를 통해 어느 날 그리스도교의 진리에 대해 듣게 되고 그것이 세상의 학문을 초월한 참된 진리임을 깨닫고 즉시 개종한 후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성녀 카타리나는 “황금 전설”에 따르면 철학과 수사학, 문법 등을 교육받은 공주 신분의 지혜로운 처녀였는데 당시 알렉산드리아를 다스리던 로마 황제 막센티우스(Maxentius)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잔인한 박해를 시작하였고 혹독한 박해로 인해 3년간 수많은 순교자가 탄생하였는데 성녀 카타리나 역시 우상에게 희생제물 바칠 것을 강요받았지만, 미신을 버리고 창조주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고 당당하게 주장하며 황제의 명령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였습니다. 이에 성녀 카타리나는 결국 체포되고 황제 앞으로 끌려가 직접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성녀 카타리나의 박식함에 놀란 황제는 여러 철학자를 소집하여 그녀와 토론하도록 하였고 그녀의 날카로운 질문과 깊은 학식과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답변에 학자들의 말문이 모두 박혀버려 오히려 50여 명의 이방인 철학자들이 개종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황제는 극도로 분노하여 소집된 모든 학자들을 화형에 처해버립니다.

 

배교하기만 한다면 자신과 결혼시켜 주고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 주겠다는 황제의 회유와 유혹을 단호히 거절한 성녀 카타리나는 심하게 매를 맞은 뒤에 투옥되었지만 그 어떤 고문에도 흔들리지 않았고 화가 난 황제는 그녀에게 음식도 주지 말라고 명령하였는데 독방에 갇혀있는 그녀에게 비둘기들이 음식을 날라다 주었고, 아기 예수님과 함께 성모님이 발현하시어 그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었다고 합니다. 황제가 다른 도시를 방문한 후 돌아와 굶어 죽은 줄 알았던 그녀가 멀쩡한 모습으로 있는 것을 보고 쇠갈퀴가 달린 바퀴를 이용해 죽이도록 명령하였지만 바퀴는 움직이지 않았고 천사가 내려와 산산조각 내는 바람에 많은 구경꾼들과 군인이 파편에 맞아 죽게 되지만 성녀 카타리나는 전혀 상처를 입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군인들이 그녀의 굳은 신앙과 인내심으로 놀랐으며 2백여 명의 군인들이 그로 인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곧바로 참수를 당해 순교하였습니다.

 

그녀 역시 결국 참수형에 처해졌는데, 그녀의 목에서 피가 아니라 우유 같은 액체가 흘러나왔다고 하며 그녀의 시신은 천사에 의해 순교 후 시나이산 가장 높은 곳으로 옮겨졌고, 그곳에 6세기에 그곳에 그리스 정교회의 수도원이 세워졌습니다. 이 수도원은 오늘날까지도 ‘성녀 카타리나 수도원’이란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으며 많은 순례자가 찾고 있습니다. 성녀 잔 다르크(Jeanne d'Arc, 5월 30일)가 들은 신비한 목소리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카타리나는 철학자, 동정녀, 설교가의 수호성인입니다. 그녀는 왕족을 상징하는 화려한 의상과 왕관을 쓰고 순교도구였던 쇠갈퀴가 달린 바퀴나 순교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잎이나 칼과 함께 있는 모습으로 교회 미술에서 주로 등장하며 성모자와 함께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혼인을 상징하는 반지를 받는 모습으로도 표현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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