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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이야기/세례명 이야기

막시모(Maximus) 축일 3.(17-21) - 7월 2일, 7월 20일, 8월 2일, 8월 13일, 8월 18일

 

막시모(Maximus)

같은이름 : 막시무스, 막씨모, 막씨무스

 

 

17. 7월 2일 성인 막시모

신분 : 소년, 순교자

활동지역 : 카르타고(Carthago)

활동연도 : +484년

 

오늘날 북아프리카의 튀니지에 속한 카르타고에서 아리우스파에 속한 반달족(Vandals)의 왕 후네릭(Huneric)에 의해 자행된 가톨릭교회에 대한 박해 때 순교한 성 리베라토(Liberatus) 수도원장과 동료들의 순교에 대해 옛 “로마 순교록”과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모두 전해주고 있습니다. 당시 반달족은 429년에 반달족의 왕 게이세리크(Geiseric)의 지휘 하에 에스파냐에서 아프리카로 건너가 로마 제국 통치하의 아프리카를 455년 장악하였습니다. 게이세리크 왕을 계승한 후네릭(Huneric)은 477년 5천 명의 가톨릭 신자를 죽이는 대박해를 자행하였으며 통치 7년째 되던 484년에는 가톨릭교회의 모든 재산을 아리우스파 교회로 이전시키는 법령을 반포하고 아리우스파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시민권을 박탈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든 수도원에 대한 해산 명령이 내려온 것은 당연합니다.

 

성 리베라토 대수도원장과 성 보니파시오(Bonifatius) 부제, 성 세르보(Servus)와 성 루스티코(Rusticus) 차부제, 성 로가토(Rogatus)와 성 셉티모(Septimus) 수도승과 어린아이였던 성 막시모는 오늘날 튀니지 중서부의 오아시스 도시인 가프사(Gafsa, 라틴어로는 Capsa) 교외의 수도원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가톨릭의 정통신앙을 고백하고 체포되어 카르타고로 이송된 후 쇠사슬에 묶여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전승과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온갖 약속으로 회유하는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굳건히 신앙을 지킨 그들을 경비경들에게 뇌물을 주고서라도 신심 깊고 충실한 신앙인들이 감옥을 방문해 그들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서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키도록 격려하고 고난을 이겨나갔으나 그 사실을 알게 된 왕의 명령으로 인해 더욱 혹독한 고문을 당하게 되고 결국 왕은 낡은 배에 태워 바다에서 불태워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몇 번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불은 붙지 않고 계속 꺼져버렸고 박해자는 분노하여 그들을 나무 기둥에 못 박은 후 그들의 머리가 깨질 때까지 노를 들고 때린 후 바다에 그들의 시신을 던져버립니다. 박해자들은 특히 어린 성 막시모를 회유하려고 노력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시신이 파도를 타고 해안으로 밀려왔고 그들의 시신을 가톨릭 신자들이 정중히 수습하여 고대 카르타고 항구 근처에 있는 비구아(Bigua) 수도원에 매장하였습니다. 옛 “로마 순교록”은 8월 17일에 성 리베라토와 여섯 명의 동료 순교자들을 기념하였으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은 이들의 축일을 7월 2일로 옮겨 기록하였습니다.

 

18. 7월 20일 성인 막시모

신분 : 순교자

활동연도 : +연대미상

 

시리아의 다마스쿠스(Damascus)에서 성 막시모와 성 마크로비우스(Macrobius), 성 사비누스(Sabinus), 성 율리아누스(Julianus), 성녀 바울라(Paula), 성녀 카시아(Cassia)와 다른 10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때문에 순교하였습니다.

 

19. 8월 2일 성인 막시모

신분 : 주교

활동지역 : 파도바(Padova)

활동연도 : +195년

 

성 프로스도키무스(Prosdocimus, 11월 7일)를 계승해서 이탈리아 파도바의 주교가 된 성 막시모의 유해는 1053년에 발견되었으며 교황 성 레오 9세(Leo IX)에 의해 안치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20. 8월 13일 성인 막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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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막시모(8월 13일)

 

신분 : 수도원장, 증거자

활동연도 : 580-662년

 

성 막시모는 참 진리를 전하려는 그의 노력과 그가 받은 고통으로 인해 증거자로 불리고 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태생인 그는 7세기 최고의 정통교리 수호자였던 그는 성좌의 최고 권위를 열렬하게 옹호했던 인물로 헤라클리우스 1세 황제의 비서로 있다가 사임한 후 크리소폴리스(Chrysopolis)에서 수도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그곳의 원장으로 여러 편의 신비적인 논문들을 남긴 그는 특히 그리스도 단성설을 주장하는 이들과 이를 옹호하는 칙서를 낸 콘스탄틴 2세 황제와 투쟁하는 사람들의 지도자로 활약하였으며 교황 호노리우스 1세(Honorius I)를 도와 교황권의 확립을 위해 적극 헌신하였습니다. 또한 콘스탄틴 황제의 단성설을 옹호하는 ‘티포스’라는 칙서를 단죄하기 위하여 649년의 라테라노 공의회(Council of Laterano)에 참석하여 맹활약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비치아(Bizya)로 유배된 그는 6년을 페르베리스에서 지내야만 했으며 그 후 콘스탄티노플로 송환되어 고문을 받고 투옥됩니다. 이 무시무시한 여행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인해 성 막시모는 흑해 연안에 있는 라지카에서 662년 8월 13일 운명하였습니다. 비잔틴 신비주의의 핵심 인물인 그는 신학, 신비신학, 수덕신학에 대한 많은 글을 포함하여 성서주석, 영적인 대화집 및 전례적인 상징에 관한 논문 “신비 안내서”(Mystagogia)를 저술한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21. 8월 18일 성인 막시모

신분 : 석공, 순교자

활동연도 : +2세기

 

그리스 전승에 따르면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출신의 쌍둥이 형제였던 성 플로로(Florus)와 성 라우로(Laurus)는 일리리아(Illyria, 발칸 반도 서부 지역)의 이교도 신전 공사장에서 일하던 석공이었는데 그들은 석공 기술자이자 고용주인 성 막시모와 성 프로쿨로(Proculus)에게 석공 기술을 배웠습니다. 이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이었는데 품삯을 받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던 이들 형제는 어느 이교도 사제의 아들이 바위 조각에 상처를 입자 그를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킨 후 치료해 주게 되는데 이교도 사제는 이를 계기로 개종합니다. 신전이 완성되자 그들은 모든 이교 신상을 끌어내려 부수고 십자가를 세워 그 지방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기도와 예배를 드리고 이로 인해 체포됩니다.

 

결국 성 막시모와 성 프로쿨로와 함께 우상 파괴에 참여한 모든 그리스도인은 화형을 당하여 순교하게 되고 성 플로로와 성 라우로 형제는 총독에게 끌려가 고문을 당한 후 마른 우물에 던져져 순교하였습니다. 이들 형제의 유해가 나중에 발견되면서 그 당시 말들에게 유행하던 역병도 그쳤다고 전해집니다. 이 때문에 이들 형제는 말(馬)의 수호자로서 교회 미술 안에서 말과 함께 그려지고 있으며 특별히 동방 정교회와 러시아에서 큰 공경을 받았습니다. 옛 “로마 순교록”은 이들 네 순교자의 이야기를 8월 18일 목록에서 전해 주었으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에서는 더는 그들의 이름을 찾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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