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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이야기/세례명 이야기

마르코(Mark) 축일 2.(6) - 4월 25일

 

마르코(Mark)

 

6. 4월 25일 성인 마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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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마르코(4월 25일)

 

신분 : 복음사가, 주교, 순교자

활동연도 : +74년경

같은이름 : 마르꼬, 마르꾸스, 마르쿠스, 마크, 말구

 

성 마르코는 마르코 복음서의 저자로 여겨지고 있으며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사도 12,12. 25)과 동일 인물입니다. 요한은 유다식 이름이며 마르코는 로마-그리스식 이름으로 예루살렘 가정 교회의 집주인이자 사도들과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집회를 가졌던 마리아(Maria)가 그의 어머니인 듯합니다. 성 마르코는 이러한 이유로 사도들과 일찍부터 친밀한 관계였음이 분명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큰 존경을 받았으며 사도들의 신임을 얻었던 사도 성 바르나바(Barnabas, 6월 11일)와는 사촌 간이었던(콜로 4,10) 그는 사도 성 바오로(Paulus, 6월 29일)와 성 바르나바를 수행하여 안티오키아(Antiochia)로 갔고(사도 12,25), 그다음에는 키프로스(Cyprus)로 성 바르나바와 함께 가서 성 바오로의 제 1차 선교여행을 성 바르나바와 같이 수행하였습니다(사도 13,5). 그러나 팜필리아에서 성 바오로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는데(사도 13,13)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성 바오로와의 의견 대립으로 보이며 이 때문에 성 바오로의 제2차 선교여행에는 동행하지 않았습니다(사도 15,36-40). 성 마르코는 그 후 성 바르나바와 함께 키프로스로 갔지만(사도 15,39), 로마에서 성 바오로가 투옥되었을 때는 그와 함께 갇혀 있었습니다(콜로 4,10).

 

사도 성 베드로(Petrus, 6월 29일)의 제자였던 성 마르코를 성 베드로는 애정 깊게 ‘나의 아들 마르코’라고 언급하였으며(1 베드 5,13). 그는 여러 번 신약성경에도 언급되었던 예루살렘 출신의 요한 마르코임이 분명합니다(사도 12,25). 교회 전승에 따르면 그는 사도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은 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감옷에 갇혔다가 천사의 도움으로 사도 베드로가 기적적으로 풀려났을 때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갔다”(12,12)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사도 베드로와 성 마르코는 가까운 관계였는데 초대 교회 전승은 그가 사도 성 베드로의 대변인이자 통역관 역할을 한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합니다. 성 파피아스(Papias, 2월 22일)는 소아시아 지방 히에라폴리스(Hierapolis)의 주교로 그는 사도 성 베드로의 통역자로서 성 마르코가 직접 예수님의 말씀을 듣거나 따라다니지는 않았지만, 성 베드로에게 자신이 전해 들은 증언과 가르침을 정확하게 기록했다고 115년경에 처음으로 전해주었습니다. 그러나 동방 교회에서는 요한 마르코를 성 마르코 복음사가와는 다른 사람으로 여기고 있으며 그가 비블로스(Byblos)의 주교였다고 말하며 9월 27일에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어쨌든 성 마르코는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60~70년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서를 처음으로 기술하였는데 이 내용은 주로 사도 성 베드로의 가르침을 기초로 하였는데 이는 이미 초대 교회에서부터 마르코 복음의 사도의 전승적 권위가 인정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성 파피아스 외에도 리옹의 성 이레네오(Irenaeus, 6월 28일),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s, 150-215년), 그리고 여러 교부들이 성 파피아스의 증언을 받아들였으며 이러한 증언은 교회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전승이나 교부들의 증언에 따르면 사도 성 베드로에 의해 이집트로 파견된 성 마르코는 그곳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했으며,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 교회를 세우고 초대 주교가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성 마르코 주교는 어느 부활 대축일에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다가 이교도들의 습격을 받아 붙잡히게 되고 거리를 밧줄에 목이 묶인 채 끌려다니다가 순교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마르코의 시신을 이교도들이 불태우려 하자 천둥과 번개가 내리쳤고, 신자들은 그 큼을 타 그의 시신을 수습해 인근 성당에 모셨다고 전해집니다.

 

그 후 828년 알렉산드리아에서 베네치아(Venezia)로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상인들에 의해 성 마르코의 유해가 옮겨졌고 베네치아 사람들은 이를 기념하여 성인의 이름을 딴 산마르코 대성당(Basilica di San Marco)을 짓고 그곳에 성인의 유해를 모셨습니다. 그 후 성 마르코 복음사가는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으로서 공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날개가 달린 사자가 그의 상징으로 주로 등장하는데, 이는 그의 복음서가 세례자 성 요한(Joannes, 6월 24일)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시작하자 그 소리를 예술적으로 포효하는 사자와 비교하면서 생겨났으며 날개는 에제키엘(Ezechiel) 예언자가 환시로 본 네 마리 생물을 복음사가들에 적용한 데서 유래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그는 책이나 두루마리, 또는 긴 펜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교회 미술에서 많이 표현됩니다. 옛 “로마 순교록”과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알렉산드리아 교회를 세웠으며 복음서의 저자인 성 마르코에 대해 모두 4월 25일 목록에서 전해주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처음에는 복음사가 성 마르코는 사도 성 바오로의 사도직을 동행하였으며 다음으로 그를 아들이라 불렀던 사도 성 베드로의 통역관이자 제자로 스승의 발자취를 따랐으며, 사도들의 가르침을 모아 로마에서 복음서를 썼고, 이집트로 가서 알렉산드리아 교회를 설립한 후 복음을 전하다가 체포되어 고초를 겪은 후에 감옥에서 순교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개정 “로마 순교록”은 순교 여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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