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오니시오 (Dionysius)
같은이름 : 데니스, 드니, 디오니시우스, 디오니씨오, 디오니씨우스
7. 4월 8일 성인 디오니시오 1
신분 : 주교, 증거자
활동지역 :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활동연도 : 190?-265년경
오리게네스(Origenes)의 제자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던 성 디오니시오는 232년에 오리게네스의 후임이었던 헤라클라스(Heraclas) 교장이 주교가 되자 그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 교리교사 학교의 교장이 되었습니다. 15년 가까이 교장으로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그는 247년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은 250년 데키우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가 시작되었고 결국 체포됩니다. 다행히 탈출에 성공한 그는 리비아 사막의 모처에서 자기 교구를 사목하였고 이듬해 데키우스 황제가 사망하자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옵니다. 돌아온 뒤에는 박해 중에 배교한 신자들에 대한 처리 문제로 논란이 일었는데 카르타고의 치프리아노(Cyprianus, 9월 16일) 주교와 함께 성 디오니시오는 합당한 참회 절차를 걸쳐 파문받은 배교자들을 교회에 다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참회 예식이 교회 안에 뿌리내리는 데 공헌하였습니다.
또한 성 고르넬리오(Cornelius, 9월 16일)가 251년 3월에 교황으로 선출되자 이에 반대하여 독자적인 교회를 세우고 가(假)교황이 된 노바티아누스(Novatianus)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잘못을 지적하고 일치를 이루도록 촉구하였습니다. 그는 로마와 지역 교회의 일치와 평화를 위해 중재자로서도 노력하였지만 257년에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가 시작되자 체포되었고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한 그는 리비아로, 그다음에는 이집트로 귀양을 가게 됩니다. 261년에는 다행히 귀양에서 돌아오지만 전쟁과 정치적 혼란, 빈곤과 페스트 같은 전염병으로 인해 교구는 극도로 혼란스러웠고 이러한 가운데 교구를 다스리다가 연로한 나이였던 265년경 선종하였습니다.
주교직을 수행하는 내내 온갖 시련을 견뎌내야만 했던 그는 신앙의 ‘증거자’로서 온갖 고문과 고통을 받았지만 그러면서도 교회와 사회 재건을 위해 활발히 활동하였고 신학과 그리스도교 문학뿐 아니라 이방인 문학에도 정통한 인물이었으며 생전에 보여주었던 용기와 믿음, 학문적 소양과 사목적 열정으로 위대한 인물로 존경받았으며, 사후에 ‘대(大, magnus)’라는 칭호를 받아 ‘대 디오니시오’(Dionysius the Great)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옛 “로마 순교록”은 그를 11월 17일 목록에 기록하였으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그의 신앙고백과 증거를 4월 8일로 옮겨 기리고 있습니다.
8. 4월 8일 성인 디오니시오 2
신분 : 주교, 증거자
활동지역 : 코린토스(Corinthos)
활동연도 : +180년경
코린토스의 성 디오니시우스(또는 디오니시오) 주교는 2세기의 뛰어난 교회의 지도자이자 감동적인 설교가였습니다. 그는 오늘날 가르치고 훈계하며 위로를 주려했던 교회작가로 부각되어 기려집니다. 교회 역사가인 에우세비우스(Eusebius)는 그가 다른 여러 교회에 보낸 교훈적인 편지들에 대해 언급하였고 이로 인해 성 디오니시오는 우리에게 알려졌습니다.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사도 성 베드로(Petrus)와 성 바오로(Paulus)가 로마에서 순교한 사건에 대한 기록입니다. 두 사도는 코린토스에 신앙을 전파한 후 이탈리아로 갔고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피로써 로마에서 자신들의 증언을 보증하였습니다.
또 다른 편지는 로마 교회에서 전통적 지원금에 대해 쓴 감사 편지인데 교황 성 소테르(Soter, 4월 22일)의 재임 기간 중에 썼던 편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시초부터 모든 곳에 지원금을 주어 많은 교회들이 존재할 수 있는 윤택함을 주는 것이 로마 교회의 관습이었습니다. 로마 교회는 교부들의 예를 따라 광산에서 일하는 이들의 필요에 적절한 위안을 주었습니다. 로마 교회의 복된 주교 소테르는 그런 점에서 조상들의 전통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고 그 이상으로 나아가, 위로와 조언을 차치하고라도 자녀들을 향한 아버지의 부드러운 음식의 보고를 주시며 모든 이가 그에게 다가오도록 해 주십니다. 오늘 주님의 날을 함께 경축하며 클레멘스(Clemens)가 우리에게 보내셨던 편지를 읽었던 것과 동일하게 교황님의 편지를 읽었습니다.”
성 디오니시오스는 다른 곳에서 성경의 잘못에서 기인하는 그릇된 학설보다는 이교도적 철학 원리를 수용함으로써 생기는 과격한 이론(異論)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였는데 그는 이교적 오류의 근원과 철학적 분파에서 생기는 각각의 오류들을 지적하였습니다. 성 디오니시오는 평화롭게 선종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 그가 많은 싸움을 했기에 그를 순교자로 섬기고 있으며 그를 라틴 교회는 증거자로서 공경하고 있습니다. 후에 그의 유해는 로마로 옮겨졌고,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는 1215년에 그의 해를 파리 근처에 있는 생드니(Saint-Denis) 대수도원으로 보냈는데, 그 유해를 그곳의 수도자들은 10월 9일이 축일인 레오파고스(Areopagos)의 성 디오니시우스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우해가 두 성인 중 누구의 유해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9. 4월 19일 성인 디오니시오
신분 : 순교자
활동연도 : +275년
고대 소아시아 지방인 팜필리아(Pamphylia)의 순교자였던 성 디오니시오와 성 소크라테스(Socrates)는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때 칼에 찔려 순교하였습니다.
10. 5월 9일 성인 디오니시오
신분 : 주교, 증거자
활동지역 : 비엔(Vienne)
활동연도 : +193년경?
2세기 초 갈리아 지방 복음화를 위해 교황 성 식스토 1세(Sixtus I, 4월 3일)가 파견한 10명의 선교사 중 한 명이었던 성 디오니시오는 성 유스토(Justus)를 계승하여 프랑스 남동부에서 이탈리아 국경에 이르는 옛 지방인 도피네(Dauphine)에 있는 비엔의 주교가 되었습니다. 그를 일부 기록에서는 순교자로 묘사하고 있지만 옛 “로마 순교록”은 그를 ‘증거자’로 기록하였으며 그가 활동하던 시기 역시 2세기가 아닌 4세기로 보기도 합니다. 옛 “로마 순교록”은 5월 8일에 그의 축일을 기념하였으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5월 9일로 옮겨 기념하도록 하였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