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릭스(Felix)
같은이름 : 펠리체
29. 5월 24일 성인 펠릭스
신분 : 순교자
활동연도 : +연대미상
성 펠릭스와 성 디오클라(Diocles), 성 세르빌리우스(Servilius), 성 실바누스(Silvanus), 성 조엘루스(Zoellus)는 순교하였으나 순교 시기나 순교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30. 5월 28일 성인 펠릭스
신분 : 순교자
활동연도 : +연대미상
성 펠릭스와 성 루키아누스(Lucianus), 성 아이밀리우스(Aemilius), 성 프리아무스(Priamus) 순교자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그들에게 사르데냐(Sardegna)의 한 성당이 봉헌되었다는 것입니다.
31. 5월 31일 성인 펠릭스
신분 : 수사
활동지역 : 니코시아(Nicosia)
활동연도 : 1715-1787년
시칠리아(Sicilia) 섬의 니코시아에서 1715년 11월 5일 아버지 필리포 아모로소(Filippo Amoroso)와 어머니 카르멜라 피로(Carmela Pirro)의 아들로 태어난 니코시아의 성 펠릭스는 태어난 그날로 바로 필리푸스 야고보(Philippus Jacobus)라는 이름으로 세례성사를 받았습니다. 작은 구둣가게를 운영하던 제화공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아내와 세 자녀를 남겨두고 그가 태어나기 한 달 전쯤인 10월 12일에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비록 가난했지만 그의 가족은 매우 깊은 신앙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펠릭스는 어린 소년 시절에 조반니 카바렐리(Giovanni Cavarelli) 제화공의 작업장에서 구두 만드는 일을 했는데 이곳은 카푸친 작은 형제회 수도원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종종 수도원 공동체를 방문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 수도원에 대해 알게 되면서부터 그들의 삶의 방식을 동경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시칠리아 섬의 소년들은 학교를 다니지 몫했는데 그 역시 학교를 다니지 못했으나 더 많은 시간을 수도원에서 보내게 된 그는 수도자들의 생활, 즉 그들의 자유로운 가난과 자발적인 엄격함, 참회와 기도, 애덕과 선교 정신에 더 깊이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니코시아 수도원의 원장에게 20살 때 그는 평수사로 입회할 수 있도록 메시나(Messina)의 관구장 신부에게 말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는 문맹이었으므로 성직자가 될 수는 없었으나 그의 겸손하고 단순한 천성에 비추었을 때 평수사로서의 성소는 더 적합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뜻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8년 동안 계속해서 입회를 요청했지만 그에게 매번 돌아온 것은 거절의 답변뿐이었습니다. 그래도 실망하지 않았던 그는 자신의 성소를 더욱 굳건히 키워갔습니다. 그는 충분한 숙고의 기회를 통해서 오랜 시간에 걸쳐 잘 준비한 성소자였습니다. 그토록 많은 거절을 당했지만 그에게 카푸친 형제회와 하느님의 사람은 하나이자 같은 존재였기에 놀랍게도 그는 다른 비슷한 수도회에 입회할 시도는 하지 않았습니다.
1743년 펠릭스는 메시나의 관구장 신부가 니코시아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오랫동안 간직해 온 자신의 소망을 그를 만나 설명하고자 청했고, 마침내 관구장 신부로부터 입회 허락을 받아 미스트레타(Mistretta)에 있는 수도원에서 수련기를 시작하게 됩니다. 1743년 10월 10일 수련기에 들어가면서 펠릭스라는 수도명을 선택한 그는 많은 덕행들을 실천하며 특별한 해를 지내게 죕니다. 그의 전기를 쓴 모든 작가들은 순명과 순결, 금욕에 대한 사랑과 천사적 인내에 있어서 펠릭스 수사야말로 그 수도원에서 가장 두드러진 존재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덕행들을 간직한 채 1년간의 수련기를 마치고 1744년 10월 10일 첫 서원을 발했습니다.
미스트레타의 수도원장은 그의 첫 서원 후 펠릭스 수사를 평소 관례와는 달리 고향인 니코시아의 수도원으로 보냈는데 친척과 지인들로부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기 때문에 고향 마을로 젊은 수도자가 파견되는 것은 일반적인 예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영적 성장을 이루는데 있어서 세상의 모든 애착으로부터 초연한 펠릭스 수사라면 아무런 해가 되지 않을 것으로 수도원장은 믿었는데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의 금언대로 성 펠릭스 수도자는 이미 몸으로 이 세상에서 순례자요 이방인으로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실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니코시아 수도원에서 구호금 모금의 소임을 받아 매일같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탁발에 나섰고 부자들의 대문을 두드리며 그들의 부유함을 나누도록 초대하였으며 가난한 이들의 초라한 대문을 두드리면서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구호품을 제공하였습니다. 그는 이집 저집으로 거리에서 옮겨 다니면서도 늘 평온함과 신중함을 간직하였으며 어떤 것을 받든지 항상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였고 그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에게조차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라고 응답하였습니다. 글을 읽고 쓸 수가 없었던 그는 교리조차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성경을 제대로 읽을 수도 없었지만 삶으로 풀고 마음으로 배우며 영혼을 풍요롭게 만들어갔습니다. 수도원 식탁에서 들려주는 교훈적인 책의 한 구절 한 구절을 그는 온몸으로 느끼고자 노력하였고 니코시아 성당에서 강론을 들을 기회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 대한 깊은 신심을 갖고 있었던 그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매주 금요일마다 묵상하고, 3월의 매 금요일에는 십자가 모양으로 두 팔을 치켜 올리고 무릎을 꿇은 상태로 단단히 굳은 빵과 물만 먹으며 십자고상 앞에서 깊은 명상에 잠겼습니다. 성체성사에 대한 특별한 경외심을 갖고 있었던 그는 감실 앞에서 매일의 고된 일들을 마친 후에도 몇 시간씩을 보내곤 했으며 하느님의 어머니에 대해서도 깊은 신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엄격한 참회와 금욕 생활로 인해 육체적으로 병약해진 그는 모든 의무에서 벗어나게 되는데 수도원의 병실에 머물면서도 펠릭스 수사는 늘 다른 병든 수사들을 위해 어떠한 봉사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점점 건강은 더 나빠졌지만 하느님께 대한 그의 집중과 기쁨, 단순한 순명의 정신은 더욱더 강해졌습니다.
정원에서 일하던 펠릭스 수사에게 1787년 5월 말경 갑작스러운 고열이 찾아오자 마카리오(Macario) 원장 신부는 순명의 자세로 그에게 누워서 쉬라고 요구하였고 그는 자신의 마지막이 다가왔음을 깨닫고 약을 처방하는 의사에게 모든 것이 이제는 소용없다고 말한 후 5월 31일 새벽 2시, 지상에서의 삶을 마감하고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1891년에 그의 유해는 니코시아의 주교좌성당으로 옮겨 안치되었습니다.
일생 동안 엄격한 고행과 탁발로써 큰 덕을 쌓은 펠릭스 수사는 이웃에게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을 표현하며 살았으며 육체뿐만 아니라 영적인 병을 앓는 사람까지 치유하는 놀라운 은사가 있었기에 그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는 60세가 지난 후에도 하느님께 늘 간구하며 병자들을 치료하고 노동을 계속하였으며 허가 없이 행한 일은 아무것도 없을 정도로 순명하며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1888년 2월 12일 시복되었고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2005년 10월 23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그의 축일을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서는 6월 2일에 기념하고 있습니다.
32. 6월 11일 성인 펠릭스
신분 : 순교자
활동연도 : +296년?
로마 순교록에 의하면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통치 때 펠릭스와 포르투나투스(Fortunatus)가 이탈리아 비첸차(Vicenza) 출신의 형제로 아퀼레이아(Aquileia)에서 순교하였습니다. 박해자들이 그들의 옆구리를 횃불로 지졌으나 하느님의 역사하심으로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다고 전해지며 그러자 끓는 기름을 덮어 씌웠지만 그래도 죽지 않고 하느님을 찬미하자 하는 수 없이 목을 잘랐다고 전해집니다.
33. 6월 14일 성인 펠릭스
신분 : 수도승, 순교자
활동지역 : 코르도바(Cordoba)
활동연도 : +853년
에스파냐 남부 코르도바에 있는 성 아키스클루스(Acisclus) 성당의 부제였던 성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us)는 후에 근처 타바노스(Tabanos)에 있는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수도승이 되었습니다. 알칼라(Alcala)에서 베르베르(Berber, 북아프리카 원주민의 한 종족) 가문의 일원으로 태어난 성 펠릭스는 아스투리아스(Asturias)에서 서원을 한 후 성 아나스타시우스와 같은 수도원으로 옮겼으며 성녀 디냐(Digna) 역시 같은 수도회의 수녀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코르도바에서 무어인 칼리프의 명령에 의해 같은 날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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