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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이야기/세례명 이야기

클로틸다(Clotilde) 축일 - 6월 3일

 

 

클로틸다 (Clotilde)

같은이름 : 글로틸다, 글로틸드, 클로틸드, 끌로틸다, 클로틸디스, 끌로틸디스

 

클로틸다는 축일이 6월 3일 하루뿐이라 클로틸다가 마음에 들 경우 6월 3일로 해야 하지만 하루뿐임에도 불구하고 여성분들이 많이 사용하는 세례명이며 연예인 중 고소영과 채시라의 세례명이기도 합니다.

 

6월 3일 성녀 클로틸다

성녀클로틸다
성녀 클로틸다 (6월 3일)

신분 : 왕비

활동연도 : 474?-545년

 

부르고뉴(Burgundy) 공국의 왕 킬페리크 2세(Chilperic II)의 딸인 성녀 클로틸다(Clotildis)는 오늘날 프랑스의 리옹(Lyon)에서 474년경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가톨릭 신자로 남편인 킬페리크 2세는 비신자였지만 딸들에게 가톨릭 교육을 해도 좋다는 약속을 받아 이를 실천하였습니다. 그러나 왕국을 분할 통치하던 다른 형제인 공드보(Gondebaud)의 손에 킬페리크 2세가 486년경 또는 493년에 암살당하였고 삼촌에 의해 어머니마저 우물에 던져져 익사당하자 그녀는 다른 자매인 크로나(Chrona)와 함께 왕국에서 추방당하게 되고 크로나는 제네바(Geneva)에서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 생활에 전념하게 됩니다. 성녀 클로틸다는 프랑크 왕국의 초대 국왕인 클로비스(Clovis I)에게 493년 청혼을 받게 되는데 공드보 왕은 이 결혼을 썩 반기지는 않았지만 마지못해 정치적 이유로 수락하게 되고 클로비스 왕은 그녀를 많은 부하를 대동하고 와서 맞이한 후 수아송(Soissons)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성녀 클로틸다는 결혼 후 기회가 되는대로 남편인 클로비스를 그리스도교로 인도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랭스(Reims)의 주교였던 성 레미기우스(Remigius, 1월 13일)도 그녀를 도왔으나 그녀의 첫째 아들이 세례성사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는 시련이 닥치고 클로비스 왕은 아들이 일찍 죽은 탓을 세례를 받은 탓이라고 생각해 아내인 성녀 클로틸다를 원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혼인 전 약속했기 때문에 다른 자녀들이 세례 받는 것을 막지는 않았습니다. 그녀의 둘째 아들도 세례를 받은 후 중병에 걸리지만 그녀의 간절한 기도로 건강을 되찾았고 그 후 태어난 두 아들과 딸 하나는 모두 건강하게 자랐습니다.

 

게르만족의 하나인 알레마니족(Alemanni)이 495년 쳐들어오자 클로비스 왕의 연합군은 전투에 패해 톨비악(Tolbiac)까지 퇴각하였으며 탈주병이 속출하고 군인들의 사기가 떨어지는 가운데 국가의 운명이 걸린 톨비악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자신의 아내인 클로틸다가 믿는 그리스도를 전 국민과 함께 섬기겠다고 클로비스 왕은 기도하며 외치는데 그의 아내의 기도로 힘을 얻은 클로비스의 군대는 톨비악 전투에서 496년 대승을 거두고 무사히 돌아옵니다. 성녀 클로틸다는 클로비스의 승리와 개선을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기쁨으로 맞이하였고 랭스 성 레미기우스 주교와 함께 남편의 세례를 준비시켰으며 주님 성탄 대축일에 클로비스 왕은 성 레미기우스 주교에게 세례성사를 받게 되었고(498년 또는 499년) 이는 프랑크 왕국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후 남편의 도움을 받아 성녀 클로틸다는 파리에 후에 성 제노베파 소도원 상당이 되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에게 봉헌한 거룩한 사도들의 성당을 비롯하여 몇 개의 성당을 건립합니다.

 

성녀 클로틸다는 클로비스 왕이 511년 사망하자 궁전을 떠나 투르(Tours)에 있는 성 마르티누스(Martinus) 수도원으로 들어가 가난한 이들과 병자를 돌보며 지내게 되는데 그러던 중 친척들 간에 권력 투쟁이 벌어져 거기에 그녀의 자식들도 참여해 형제끼리 싸우게 되자 더욱 간절하게 기도하게 됩니다. 임종을 앞두고 그녀는 마침내 아들들의 화해를 보게 되고 투르의 성 마르티누스 주교의 무덤 앞에서 545년 6월 3일 숨을 거두었고 남편이 묻혀 있는 파리의 거룩한 사도들의 성당으로 유해가 운구되어 남편 곁에 안장되었습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그녀가 남편인 클로비스 왕이 신앙을 받아들이도록 기도로써 인도하였고 남편이 사망한 후에는 마르티누스 수도원으로 들어가 여왕이 아닌 주님의 참된 종으로 살기 위해 노력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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