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John)
1. 1월 12일 성인 요한
신분 : 주교
활동지역 : 라벤나(Ravenna)
활동연도 : +4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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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은 라벤나의 주교(452-494년)로 훈족의 왕인 아틸라(Atila)의 분노로부터 사람들을 구하고, 도시가 동고트족(Ostrogoths)의 왕 테오도리쿠스(Theodoricus)에 의해 점령되었을 때 사람들의 슬픔을 위로하였습니다.
2. 1월 17일 성인 요한
신분 : 수도승
활동연도 : +5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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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과 성 메룰루스(Merulus), 성 안토니우스(Antonius)는 이탈리아 로마(Roma)의 코일리아노 언덕에 있는 성 안드레아 수도원의 수사들이었습니다.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 교황은 당시 수도원장이었는데 그들의 덕행과 기적적인 능력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였습니다.
3. 1월 23일 성인 요한
신분 : 대주교, 자선가
활동지역 :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활동연도 : 560?-619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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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은 귀족 가문 태생으로 키프로스(Cyprus) 섬의 관리인 에피파니우스(Epiphanius)의 아들입니다.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아내와 자식을 두었던 그는 가족과 모두 사별하게 되었는데 이후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고 수도 생활로 전향하였습니다. 애덕을 타고난 듯 보여진 그는 608년에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로 임명되었고 그 즉시 교구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을 돕거나 시리아에서 온 피난민을 구제하는데 나누어 주었으며 병원을 찾아 환자들을 간호하는 데에도 남다른 열성을 보였습니다.
그는 자기 교구 내에 성직매매나 성직자들의 타락을 맹렬히 공격하여 바로 잡았으나 난처한 입장에 있는 이들에게는 지극히 관대하였으며 재임기간 동안에는 그리스도 단성설을 종식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정통 교회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페르시아인의 침략으로 알렉산드리아를 떠나야 할 입장에 놓이게 되는데 이때 니케타(Nicetas)와 함께 콘스탄티노플로 가던 길에 자신의 죽음에 대한 환시를 보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운명하였습니다.
4. 1월 27일 복자 요한
신분 : 주교
활동지역 : 워너턴(Warneton)
활동연도 : +11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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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북동부 플랑드르(Flandre)의 워너턴에서 태어난 요한은 신심 깊고 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운 좋게도 어릴 때에 위트레흐트(Utrecht)의 람베르투스(Lambertus)와 샤르트르(Chartre)의 성 이보(Ivo, 5월 23일)의 제자로 교육을 받게 된 그는 학업을 마친 후 잠시 자기 관구로 돌아왔다가 다시 프랑스 아라스(Arras) 교외에 있는 몽-생-엘로이 수도원에 들어갑니다. 이때 아라스의 주교가 그를 총애하여 그 교구의 부제가 되라고 권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테루안(Therouanne) 교구장이 되는 서막이었습니다. 그가 그 후 주교가 되었을 때 그에게 성좌에서 중요한 선교 사명들을 맡겼고 스는 사명을 성실히 수행하였고 대중적인 인기를 끌면서 만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교회가 엄격한 시대였지만 그는 항상 온순하게 처신하였습니다.
5. 1월 28일 성인 요한
신분 : 신부, 수도원장
활동지역 : 레오마이(Reomay)
활동연도 : 425-539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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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그르(Langres) 교구의 디종(Dijon)에서 태어난 성 요한은 프랑스 수도생활의 개척자로서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처음에 레오마이에서 은수생활을 시작한 그는 그곳에 제자들이 모여들자 몰래 레랭(Lerins) 수도원으로 가서 수도승이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그의 고향 주교의 명으로 무티에생장(Moutier-Saint-Jean) 수도원을 설립하기 위해 레오마이로 되돌아왔습니다. 오랫동안 그는 그 수도원을 지도하였고 그러는 동안 수많은 기적들이 일어났다고 전해집니다.
6. 1월 31일 성인 요한
신분 순교자
활동연도 +303년경
같은이름 : 얀, 존, 죤, 장, 쟝, 한스, 후안, 이반, 요안네스, 요한네스,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지오반니
성 요한과 성 키루스(Cyrus)는 매우 높이 공경을 받아온 성인들이지만 그들에 대한 기록은 신빙성은 부족합니다. 성 요한은 아랍계 군인이었으며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태생인 성 키루스는 처음에 의사였다가 나중에 은수자가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아타나시아(Athanasia)란 어느 신자 부인과 그녀의 세 딸이 신앙으로 인해 고난을 받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그들은 부인과 자녀를 찾아 위로하고 도와주다가 그들과 같은 죄목으로 체포되어 순교하였습니다. 이집트 카노푸스(Canopus) 근방 메누티스의 이시스(Isis) 신전 예배를 분쇄하기 위하여 성 키루스와 성 요한의 유해를 성 키릴루스(Cyrillus)가 대신하여 모셨는데 그곳은 이때부터 유명한 성지가 되었으며 그 후 성 키루스와 성 요한의 유해는 로마(Roma)로 옮겨졌습니다.
7. 2월 6일 성인 요한
신분 : 수사, 순교자
활동지역 : 일본(Japan)
활동연도 : 1578-1597년
같은이름 : 얀, 존, 죤, 장, 쟝, 한스, 후안, 이반, 요안네스, 요한네스,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지오반니, 고토, 요한 고토
일본 규슈(九州, Kyushu)의 나가사키(長崎, Nagasaki)현에 딸린 고토열도(五島列島, Goto Islands)의 한 섬에서 1578년 태어난 성 요한은 보통 성 요한 데 고토(Joannes de Goto, 또는 요한 고토)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성장한 그는 고토 지역을 다스리는 영주가 가톨릭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하자 신앙의 자유를 찾아 가족과 함께 나가사키로 피신하였습니다. 14살 무렵 예수회에 입회하고자 했으나 그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일단 교리교사로서 선교사들을 보조하는 일을 권유받았고 그는 이 제한을 받아들여 예수회 회원들과 함께 오사카(大阪, Osaka)에서 생활하며 연학과 교리교사 활동을 병행하였습니다.
그 무렵 일본 교회는 1587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선교사 추방령을 내린 적이 있었지만, 인도 부왕(副王)의 사절 자격으로 예수회의 순찰사 알레산드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가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방문한 뒤에는 금교의 제약 속에서 조심스럽게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는데 1596년 작은 형제회 회원들이 이런 상황에서 성당과 수도원과 병원을 오늘날의 교토(京都, Kyoto) 지방인 미야코(宮古, Miyako) 일대에서 건립하는 등 공공연한 전교 활동을 전개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정치적 부담을 줌과 동시에 일본 지배층들의 반감을 사게 됩니다. 게다가 그해 여름에는 에스파냐 선박 산 펠리페(San Felipe) 호가 필리핀의 마닐라(Manila)를 떠나 멕시코로 가던 중 태풍에 밀려 일본 해안으로 떠밀려오면서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일본 관리들과 선원들이 대화하던 중 에스파냐의 왕권과 정복욕을 자랑하면서 일본을 무시하는 말을 하고 선교사들에 대해 부정적 인상을 심어주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분노를 자아낸 것입니다.
그 결과 게이한(京阪, 교토와 오사카) 지방에서 활동하던 작은 형제회 회원들을 체포하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이 1596년 12월에 내려지면서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되었고, 12월 9일부터 성 요한도 예수회의 성 바오로 미키(Paulus Miki) 수사와 교리교사로 활동하던 성 야고보 키사이(Jacobus Kisai)와 함께 가택 연금됩니다. 그리고 이듬해 초에 미야코로 이송되어 6명의 작은 형제회 신부와 수사, 그리고 작은 형제회 일본인 재속 3회원 15명과 함께 감금되었습니다. 미야코 감옥에 갇혔던 성 요한과 23명의 동료는 1597년 1월 3일, 모두 광장으로 끌려 나와 사형선고를 받았고 혹독한 추위 속에 처형장인 나가사키까지 걸어가야 했습니다. 처형을 위해 그들이 나가사키까지 가는 동안 오르간티노(Gnecchi-Soldo Organtino) 신부에 의해 예수회 회원들을 돌보도록 파견된 성 베드로 스케지로(Petrus Sukejiro)와 작은 형제회 회원들을 돌보던 성 프란치스코 키치(Franciscus Kichi)도 그리스도교 신자임이 드러나 체포되어 모두 26명으로 늘어났습니다. 2월 5일에 나가사키 근교 우라카미(浦上, Urakami)라는 교우촌에 도착한 그들은 2명의 예수회 신부를 만나 고해성사를 받았고 성 바오로 미키는 서원을 갱신했고, 성 요한과 성 야고보 키사이는 교리교사로서 일찍부터 예수회 입회를 간절히 원했기에 마침내 입회 허가를 받고 첫 서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같은 날 나가사키 해안 근처에 있던 니시자카(西坂, Nishizaka) 언덕으로 끌려간 성 요한과 동료들은 십자가형을 받고 창에 찔려 순교하였습니다. 그의 나이는 그때 19세였습니다.
성 요한은 나가사키의 골고타 언덕으로 불리는 니시자카 언덕에서 예수님처럼 십자가형을 받고 순교할 수 있어 기뻐하였으며 이때 순교한 성 요한과 25명의 동료는 일본에서 최초의 순교자들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 그들이 순교한 언덕은 ‘순교자의 언덕’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교황 우르바노 8세(Urbanus VIII)에 의해 성 요한과 25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1627년 9월 복자품에 올랐고,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1862년 6월 8일 ‘26위의 일본 성인’으로 시성되었습니다. 옛 “로마 순교록”은 2월 5일 목록에서 성 바오로 미키와 25명의 동료의 순교 사실을 기록하였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1969년의 전례력 개정과 함께 로마 보편 전례력 안에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이 추가되었고 이 과정에서 성녀 아가타(Agatha, 2월 5일) 동정 순교자와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 2월 6일로 날짜를 옮겨 기념하고 있습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 또한 일본 성인인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에 대해 2월 6일 목록에서 기록하였습니다.
8. 3월 10일 복자 요한
신분 : 은수자
활동지역 : 발롬브로사(Vallombrosa)
활동연도 : +1380년
같은이름 : 얀, 존, 죤, 장, 쟝, 한스, 후안, 이반, 요안네스, 요한네스,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지오반니
요한은 이탈리아 피렌체(Firenze) 출신으로 고향에 있던 삼위일체 수도회에 입회하였습니다. 매우 현명하였으며 하루의 대부분을 책 읽는데 소비하는 사람이었던 그는 공부하던 중에 마술에 특히 관심을 가졌고 비밀리에 마술을 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원장의 귀에 그 소문이 들어가서 중징계를 받은 후 성실히 회개하였고, 자유의 몸이 되자 감옥생활의 고독한 분위기 속에서 이미 높은 경지에 올라 있었기에 세상의 온갖 일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으로 변화된 삶을 살게 됩니다. 원장의 도움으로 은수생활을 시작한 그의 성덕과 학덕은 널리 퍼지게 되었고 연일 그를 보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라틴어와 지방 언어로 기록된 그의 편지들과 논문들은 당대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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