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John)
같은이름 : 얀, 이반, 요안네스, 요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한스, 후안
64. 12월 17일 성인 요한
신분 : 신부, 설립자
활동지역 : 마타(Matha)
활동연도 : 1150/60?-1213년
오늘날 프랑스 남동부 프로방스(Provence) 지방의 포콩(Faucon)에서 태어난 성 요한은 귀족 가문의 신심 깊은 부모에게 어려서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에우페미우스(Euphemius)는 엑스(Aix)로 아들을 보내 젊은 귀족에게 필요한 문법 · 검술 · 승마 등을 배우게 하였으며 어머니 마르타(Martha)는 늘 어려운 사람에게 관심을 두고 도와주도록 교육하며 모범을 보여주어 그는 부모가 보내준 생활비 일부를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데 사용하였고 매주 금요일이면 병원을 방문해 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선활동과 기도 생활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그 후 파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그는 박사학위를 받은 후 32세의 나이였던 1192년 12월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그가 설립한 삼위일체 수도회의 전승에 따르면, 그다음 해 1월 28일에 첫 미사를 봉헌할 때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부르심을 받아 탈혼 상태에 빠졌다고 합니다. 탈혼 중에 흰옷을 입고 붉은색과 파란색의 십자가를 손에 든 한 천사가 자기 앞에 무릎 꿇고 있는 두 명의 포로(한 명은 무어인이고 다른 한 명은 그리스도인) 위에서 양손을 펴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이 환시가 무슬림에게 노예로 사로잡힌 그리스도인들을 해방하는 일에 헌신하라는 하느님의 뜻임을 깨닫고 노예 해방을 위한 사명을 시작하기 전에 기도와 피정의 시간이 갖고자 하였고 마침 오랫동안 모(Meaux) 교구 내의 한 숲에서 은수 생활을 하고 있던 발루아(Valois)의 성 펠릭스(Felix, 11월 4일) 신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지내게 됩니다.
기도와 단식을 실천하며 성령의 이끄심 속에서 몇 년간의 시간을 보낸 두 성인은 그리스도인 노예 해방을 위한 수도회 설립을 계획하였고 1198년 로마에 가서 수도회 설립 인가를 교황 인노첸시오 3세(Innocentius III)에게 받았는데 이것은 ‘삼위일체 수도회’(the Order of the Holy Trinity for the Redemption of Captives)의 시작이었습니다. 성 요한은 초대 총장으로 뽑혀 교황의 축복을 받고 파리로 갔고, 성 펠릭스는 삼위일체 수도회의 첫 수도원을 파리 북쪽에 있는 세르푸와(Cerfroid)에 설립하였습니다. 수도회 지원자를 모아 성 요한은 성 펠릭스에게 보내 수련과 함께 그들의 사명 수행에 필요한 덕목을 익히도록 하였으며 세르푸와의 첫 수도원에 이어 두 번째 수도원이 로마의 포르미스(Formis)에 있는 성 톰마소(Tommaso) 성당에 설립되었습니다.
1201년 처음으로 성 요한과 삼위일체 수도회의 회원들은 북아프리카의 모로코(Morocco)로 가서 86명의 노예를 속량해 해방하는 데 성공하였고 1202년과 1210년에는 튀니지(Tunisia)로 가서 모로코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서 고통받고 있는 그리스도인 노예들을 해방하기 위해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많은 이들을 구해냈습니다. 그는 ‘삼위일체 형제회’를 설립하여 해방된 이들이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직업 교육 등을 통해 수도자들과 함께 살며 독립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었으며 다른 그리스도인 노예들을 위한 자선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에스파냐에도 수도원을 건립한 그는 순회 강론으로 노예 해방을 위한 사람들의 관심과 후원을 받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는 이 모든 일을 언제나 좋은 해결책을 제시해 주시는 성모님께 의탁하면서 이루어 나갔습니다.
오랜만에 1212년경 파리 근교 세르푸와 수도원에 있는 성 펠릭스를 방문한 그는 그와 함께 즐거운 한때를 지냈는데, 1212년 11월 4일 고령이었던 성 펠릭스가 세상을 떠났는데 이때 로마의 수도원에 머물고 있던 성 요한은 자신도 1년 뒤에 성 펠릭스의 뒤를 따르리라는 것을 알고 수도회의 형제들에게 노예 해방을 위한 일을 맡긴 후 기도에 몰두하다가 1213년 12월 17일 평화로이 하느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로마의 수도원에 안치되었던 그의 시신은 에스파냐의 마드리드(Madrid)로 1655년 옮겨졌고 그의 유해와 석관은 1998년 다시 살라망카에 건립된 마타의 성 요한 성당으로 옮겨 모셔졌습니다. 교황 알렉산데르 7세(Alexander VII)에 의해 1666년 성 요한에 대한 공적인 공경이 승인되었습니다. 옛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보편 전례력에 복자 교황 인노첸시오 11세(Innocentius XI, 1679~1689년 재위, 8월 12일)의 명으로 그의 전례 기념일이 추가되면서 2월 8일로 변경되었다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른 로마 보편 전례력의 개정 이후 다시 그가 선종한 12월 17일로 되돌아갔습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도 프랑스 태생으로 로마의 첼리오(Celio) 언덕에 노예 해방을 위한 삼위일체 수도회를 설립한 성 요한에 대해 12월 17일 목록에서 기록하였습니다.
65. 12월 27일 성인 요한
신분 : 사도, 복음사가
활동연도 : +100년경?
갈릴래아의 어부로서 제베대오의 아들인 성 요한은 사도 성 대 야고보(Jacobus, 7월 25일)의 동생입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그물을 손질하던 성 야고보와 성 요한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배와 아버지와 삯꾼들을 남겨둔 채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마태 4,21-22; 마르 1,19-20; 루카 5,1-11). 성격이 매우 급하고 흥분을 잘했던 이들 형제에게(루카 9,54; 마르 10,35-41), 예수님은 ‘천둥의 아들들’이란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셨습니다(마르 3,17).
또한 예수님의 중요한 행적, 예를 들면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예수님께서 살렸을 때(마르 5,37; 루카 8,51), 겟세마니(Gethsemane)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마태 26,37; 마르 14,33),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마태 17,1; 마르 9,2; 루카 9,28)와 같은 중요한 순간에 사도 성 베드로(Petrus, 6월 29일)와 함께 예수님 곁에 있었습니다. 또 성경 곳곳에서 그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표현되며 최후의 만찬 때 스승의 가슴에 기댔던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의 예수님 곁에 마지막까지 남았던 그에게 직접 당신 어머니를 맡기셨습니다(요한 19,25-27).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히시고 안식일 다음 날, 주간 첫날 이른 아침에 무덤이 비었다는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Maria Magdalena, 7월 22일)의 말을 듣고 성 베드로와 함께 달려간 그는 예수님의 빈 무덤에 성 베드로보다 먼저 다다랐습니다(요한 20,1-5). 주님의 부활을 굳게 믿었던 그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가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알아보았고 성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요한 21,1-7).
성 요한은 사도행전에서도 성 베드로와 함께 활동하다가(사도 3장), 성 베드로와 함께 백성의 지도자들에 의해 투옥되고 당당히 최고 의회에서 증언하기도 하였습니다(사도 4,1-22). 하느님의 말씀을 사마리아 사람들이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성 베드로와 함께 파견된 그는 그들이 성령을 받도록 기도하고 사마리아의 많은 마을에 복음을 전하였습니다(사도 8,14-15.25). 사도 성 바오로(Paulus, 6월 29일)는 성 야고보와 성 베드로와 함께 요한을 일컬어 ‘교회의 기둥’이라고 불렀습니다(갈라 2,9). 후일 그는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에 대한 증언으로 인해 파트모스(Patmos) 섬에서 유배 생활을 했고(묵시 1,9),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죽은 후 에페수스(Ephesus)로 돌아와 여생을 지내다가 100년경에 선종하였습니다. 성 예로니모(Hieronymus, 9월 30일)에 따르면 너무 나이가 많았던 성 요한은 군중들에게 설교할 수 없었고, 간단한 말만 했다고 전해집니다. 6세기에 성 요한의 무덤으로 알려진 자리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사도 요한 성당’을 건립하였습니다.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사도 성 요한의 저작물이 신약성경의 네 번째 복음서(요한복음)와 세 권의 서간(요한 1·2·3서) 그리고 요한 묵시록이라고 전해져 옵니다. 그래서 성 요한은 주로 책(성경)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교회미술에서 표현되고 있으며 가장 높은 곳까지 날아오르는 독수리처럼 요한 복음서의 신학이 높고 깊은 경지에서 우리를 참된 신앙으로 인도해 주기 때문 그의 상징과 문장으로는 독수리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황금 전설” 등을 통해 독이 든 잔을 받고 성 요한이 축복하자 그 독이 뱀으로 변했다는 전설에 따라 뱀이 든 성작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도 자주 표현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던 성 요한은 하느님의 사랑을 그의 복음서와 서간을 통해 강조하였고 특별히 주님의 사랑 안에 모든 이들이 머물 것을 강조한 ‘사랑의 사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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