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 (Joseph)
22. 6월 23일 성인 요한 카파소(Joseph Cafasso)
신분 : 신부
활동연도 : 1811-1860년
같은이름 : 까파소, 요세푸스, 요제프, 조세푸스, 조세프, 조셉, 조제프, 주세페, 쥬세페, 호세
성 요셉 카파소(Josephus Cafasso)가 살레시오회의 성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성 요한 보스코(Joannes Bosco)와 절친한 친구이자 영적 지도자였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러나 그는 교구 사제였습니다.
이탈리아 피에몬테(Piemonte) 카스텔누오보 다스티(Castelnuovo d'Asti) 태생인 그는 농사를 짓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토리노(Torino) 신학교를 다녔고 1833년에 연령 미달에 대한 관면을 받고 사제로 서품되었습니다.
사제 서품 후 그는 토리노에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으나 항상 미흡하다고 생각하던 중에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 소속된 학교에서 영적인 고향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 필리푸스 네리우스(Philippus Nerius), 성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 de Sales) 그리고 성 요한 보스코와 떼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가까워진 그는 그들과 서로 영향을 끼쳤는데 그들 중에서 요셉은 가장 탁월한 설교자였습니다
또한 그의 설교는 북이탈리아에 퍼지기 시작하던 얀세니즘(Jansenism)을 퇴치토록 하였으며 그는 돈 보스코를 설득하여 소년들의 신앙교육에 헌신토록 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1860년 봄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고 그해 6월 23일 토리노에서 운명하였습니다.
그의 장례식에서 요한 보스코 성인이 강론하며 그의 성덕을 추모하였고 1947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23. 1월 28일 성인 요셉 프라이나데메츠 (Joseph Freinademetz)
신분 : 신부, 선교사
활동지역 : 중국(China)
활동연도 : 1852 - 1908년
같은이름 :요세푸스 요제프, 조세푸스, 조세프, 조셉, 조제프, 주세페, 쥬세페, 프라이나데메쯔, 호세
성 요셉 프라이나데메츠(Josephus Freinademetz, 福若瑟)는 1852년 4월 15일 오스트리아와 인접한 이탈리아 북부 알프스 산맥의 다섯 가구만 사는 작은 마을인 오이에스(Oies)에서 아버지 조반마티아(Giovanmattia)와 어머니 안나 마리아 프라이나데메츠(Anna Maria Freinademetz)의 12자녀 중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남부 티롤(South Tyrol)로 알려진 이 지방은 당시 오스트리아 헝가리(Austro-Hungarian) 제국의 영토였는데 그는 태어난 날 세례성사를 받고 가족으로부터 단순하지만 독실한 신앙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는 브레사노네(Bressanone, 브릭센 Brixen)의 교구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동안 해외 선교사로서 일생을 살아갈 것을 고심하기 시작했으며 1875년 7월 25일 사제품을 받고 고향 인근의 성 마르티누스(Martinus) 공동체로 발령을 받은 그는 곧 그곳 사람들의 마음을 얻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로서 살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는데 서품받은 지 2년째 되던 해에 말씀의 선교 수도회(Societas Verbi Divini, 신언회)의 모태가 된 ‘성 미카엘 선교 신학교’를 설립한 성 아놀드 얀센(Arnold Jansen, 1월 15일) 신부를 만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교구장 주교의 허락을 받고 1878년 8월 네덜란드의 슈타일(Steyl)에 있는 성 미카엘 선교 신학교에 들어가 그곳에서 선교 사제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한 후 1879년 3월 2일, 선교사 십자가를 받고 말씀의 선교 수도회 소속 요한 밥티스타 안제르(Joannes Baptista Anzer) 신부와 함께 중국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5주간의 항해 후 그들은 홍콩(Hong Kong)에 도착해서 2년간 머물렀고 1881년 그들은 1,200만 명의 인구에 겨우 158명의 신자가 사는 산둥성(山東省) 남부의 새로운 선교지로 선교 여정을 떠납니다.
무척 오랜 시간이 걸리는 힘겨운 여정으로 강도들의 습격을 받으면서도 첫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형성해야 하는 어려운 사명이었는데 하나의 공동체가 겨우 형성되었을 때 주교의 훈령이 도착해 그들은 모든 것을 뒤로하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되고 오래지 않아 그는 낯선 땅에 처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현지인 교리교사와 같은 헌신적인 평신도들의 중요성에 대해 깨닫게 됩니다.
그는 교리교사를 양성하기 위해 온 힘을 쏟으며 중국인을 위한 교리교육 책자를 준비하며 동시에 주교가 된 안제르와 함께 중국인 사제와 다른 선교사들의 영성적 형성과 지속적 교육을 위한 준비에 온 힘을 쏟아부었습니다.
그의 전 생애는 중국인들 안에서 중국인이 되기 위한 노력으로 점철되었으며 그는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중국과 중국인을 사랑합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서 죽기를 원하며 그들 가운데 묻혀 안식을 누리고 싶습니다.” 라고 썼다고 합니다.
1898년 성 요셉 프라이나데메츠 신부는 후두염을 앓았고, 고된 작업과 다른 많은 힘든 일의 결과로 결핵에 걸려 주교와 다른 사제들의 권유로 건강을 회복할 희망을 안고 휴식을 위해 일본으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얼마간 요양하며 건강을 회복한 후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지만 완쾌된 것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1907년 안제르 주교가 유럽에 다녀오기 위해 중국을 떠났을 때 그는 교구의 행정 책임을 맡게 되었는데 이 기간에 심각한 장티푸스 전염병이 발발하여 그는 자신이 감염될 때까지 많은 공동체를 방문하며 지칠 줄 모르는 도움을 제공했습니다.
곧 주교좌가 있는 산둥의 타이키아(Taikia, 大化)로 돌아왔지만 병세가 심해져 1908년 1월 28일 선종합니다.
그의 시신은 십자가의 길 제12처에 묻혔고, 그의 무덤은 곧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순례지가 되었습니다.
성 요셉 프라이나데메츠 신부는 어떻게 하면 중국 문화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깊이 사랑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배웠으며 모든 사람을 위한 하느님 사랑의 복음 메시지를 선포하는 데 자신의 일생을 바쳤고 중국인 신앙 공동체들을 양성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화하였습니다.
그는 활기에 넘친 공동체들이 스스로 개방해 지역 주민들과 연대하도록 했고, 중국인 신자들 스스로 교리교사 · 수도자 · 사제로서 자기 민족을 위한 선교사가 되도록 고무하였습니다.
그의 생애는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는 사랑입니다.”라는 그의 모토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1975년 10월 19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3년 10월 5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말씀의 선교 수도회의 설립자인 성 아놀드 얀센과 아프리카의 사도인 성 다니엘 콤보니(Daniel Comboni, 10월 10일) 주교와 함께 같은 교황으로부터 시성되었습니다.
24. 3월 5일 성인 요한 요셉(십자가의)(John Joseph of the Cross)
신분 : 수사
활동연도 : 1654-1734년
같은이름 :얀, 요세푸스, 요안네스, 요제프,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세푸스, 조세프, 조셉, 조안네스, 조제프, 조한네스, 존, 죤, 주세페, 쥬세페, 지오반니, 한스, 호세,
십자가의 성 요한 요셉(Joannes Josephus a Cruce)은 이탈리아 나폴리(Napoli) 연안의 이스키아(Ischia) 섬에서 태어나 카롤루스 가에타누스(Carolus Gaetanus)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의 부모는 교양 있는 모범적인 부부였고 그들의 집은 거의 항상 가난한 사람들에게 열려있었는데, 어머니인 마우라 부인은 음식을 미리 준비해 놓고 걸인들에게 나누어주곤 하였습니다.
이 부부의 일곱 아들 가운데 다섯 명이 수도원에 들어갔는데, 그들 중에서도 카롤루스가 가장 뛰어났다고 합니다.
카롤루스는 에스파냐 출신의 작은 형제회 회원들이 지키는 엄격한 청빈에 큰 감명을 받고 수도원에 입회하였는데 불과 16세의 어린 나이로 지원기를 시작했으나 그의 절제나 신심은 훌륭한 수도자의 모범으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는 서원하면서 십자가의 요한 요셉이라는 수도명을 받았고 천사적 사부인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를 본받고자 부제로 남아 있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장상들의 결정에 따라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한없이 순결한 마음을 지녔던 그는 악을 모르고 자랐기 때문에 특별한 통찰력과 영적 지혜가 충만하여 고해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그즈음에 수도원 가까운 곳에 은둔소를 세울 계획을 장상에게 말씀드려 허락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에게 수련장이란 중책을 맡겼으니 그는 성 프란치스코 당시의 엄격한 규율을 수련자들에게 적용시킬 허가를 받고서야 그 직책을 맡게 됩니다.
그는 가끔 이미 세상을 떠난 형제들의 환시를 보았는데, 그때부터 이상한 기적까지 행하곤 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치유의 은사로 병을 고치는가 하면, 음식을 많게 하는 기적을 베풀었고 자신이 죽으리라고 예언했던 산타 루치아(Santa Lucia)에서 운명하였습니다.
1789년 복자품에 올랐고, 1839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ius XVI)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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