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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이야기/세례명 이야기

요셉(Joseph) 축일 5. (13-15) _ 1월 1일, 11월 28일, 4월 12일

 

요셉(Joseph)

 

13. 1월 1일 성인 요셉 마리아 토마시 (Joseph Mary Toma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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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셉 마리아 토마시 (1월1일)

부부가 세례명을 쓸 때 마리아와 요셉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축일이 다르니 요 세례명으로 마리아랑 하셔서 축일을 맞추셔도 괜찮을 것 같아요.

 

신분 : 추기경

활동연도 : 1649년 - 1713년

같은이름 : 또마시, 똠마시, 메리, 미르얌, 미리암, 요세푸스, 요제프, 조세푸스, 조세프, 조셉, 조제프, 주세페, 쥬세페, 톰마시, 호세

 

시칠리아(Sicilia)의 알리카타(Alicata) 태생인 성 요셉 마리아 토마시(Josephus Maria Tomasi)의 부친은 팔레르모(Palermo)의 공작이었고 람페두사(Lampedusa) 섬의 왕자 칭호를 가진 분이었습니다. 요셉의 네 누이들은 부친이 팔마(Palma)에 세운 베네딕토 수녀원에서 살고 있었고 그는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았는데, 소년 요셉은 이미 훌륭한 그리스어 학자였습니다. 또한 교회 음악에도 비상한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테아틴(Theatine) 수도회 총장이 그의 재능을 높게 평가할 정도였는데 수도생활에 대한 꿈이 싹트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습니다.

그때 마침 그의 어머니가 3회원이 되었고, 그의 부친도 비슷한 결정을 함에 따라 그의 앞길을 막던 장애물이 걷혔고 그는 1665년에 팔레르모에 있는 테아틴 수도회에 입회하여 왕자의 신분을 포기하고 수련기를 거쳐 이듬해 첫 허원을 한 뒤 메시나(Messina)로 가서 그리스어를 공부하고, 그다음에 로마(Roma)로 가서 페라라(Ferrara)와 모데나(Modena) 대학을 다녔고, 1673년 12월 25일에는 나이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사제로 서품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은 거의 기도와 학문 연구에 바친 은수자의 생활이었는데 그는 그리스 철학, 성경 그리고 성무일도를 연구하였으며 그의 재능이 너무나 뛰어났기 때문에 히브리어 교사이던 랍비 모세 다 케이브가 유대교에서 개종까지 하게 됩니다.

그의 첫 저술은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스페쿨룸"(Speculum)이며, 1680년에는 고대의 전례를 서술한 "코디체스 사크라멘토룸"(Codices Sacramentorum)을 냈고, "시편"(Psalterium)은 주세페 카루스(J. M. Carus)라는 필명으로 내게 됩니다.

1697년 그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12세(Innocentius XII)에게 순종하는 뜻으로 바티칸으로 들어갔고, 1704년에는 수도자성성(Congregation of Discipline of Regulars)의 신학자로 임명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늘 단순한 생활을 했고 동료들과 함께 성가를 불렀으며 늘 초라한 음식을 즐겼습니다.

그는 한 마디로 하느님의 사랑에 푹 빠진 사람이었습니다.

미사를 드리는 그를 보고 그에게 특은이 내렸음을 누구나 인정하였고, 피조물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애정은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고도 남음이 있었다고 합니다.

1712년 추기경에 오른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고했는데, 공교롭게도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가 12월에 중병에 들자 "교황은 회복되고 내가 곧 죽을 것"이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1713년 1월 1일 로마에서 선종하였으며 1803년 교황 비오 7세(Pius V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6년 10월 1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14. 11월 28일 성인 요셉 마리아 피나텔리(Joseph Mary Pignatel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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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셉 마리아 피냐텔리 (11월 28일)

신분 : 신부 

활동연도 : 1737 - 1811년

같은이름 : 메리, 미르얌, 미리얌, 요세푸스, 요제프, 조세푸스, 조세프, 조셉, 조제프, 주세페, 쥬세페, 피나텔리, 호세

 

1737년 12월 27일 에스파냐 북동부 사라고사(Zaragoza)에서 칼라브리아(Calabria)의 몬텔레오네(Monteleone) 공작 가문 출신의 아버지 돈 안토니오(Don Antonio)와 에스파냐 백작 가문 출신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성 요셉 마리아 피냐텔리(Josephus Maria Pignatelli)는 16세 때에 타라고나(Tarragona)의 예수회에 입회합니다.

그 후 칼라튜드(Calatyud)와 사라고사 학교에서 수학하면서 일생 동안 그를 괴롭힌 결핵에 걸리게 됩니다.

1762년 사제품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감옥에서 죄수 담당 신부로 활동하였는데 특히 사형을 기다리는 죄수들을 자애롭게 돌보아 '사형수들의 아버지'라고 불렸습니다.

1767년부터 에스파냐 예수회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났을 때 원장직을 물려받은 그와 동료들은 그들의 수도회를 포기하도록 종용받았으나 거부하였으며 1773년 교황 클레멘스 14세(Clemens XIV)가 에스파냐의 강력한 요구에 굴복하여 예수회의 해체를 선언했을 때, 그는 이탈리아의 볼로냐(Bologna)로 은거하여 약 20년 동안 공부를 계속하는 한편 예수회 역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는 백러시아(White Russia, 오늘날의 벨로루시) 선교를 위한 수련소 허가를 교황청으로부터 받아내어 후보자를 양성하는 한편 예수회의 재건과 쇄신을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경주하였는데 그는 실제로 1807년 사르데냐(Sardegna)의 예수회 관구를 회복시켰고, 로마(Roma)와 티볼리(Tivoli) 그리고 오르비에토(Orvieto)에서도 그 기초를 공고히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지병인 결핵이 악화되어 1811년 11월 11일(또는 15일) 로마의 산 판탈레오네(San Pantaleone)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그가 그렇게도 원하고 또 노력하였던 예수회의 재건은 1814년 8월 7일 교황 비오 7세(Pius VII)에 의해 교서로 발표되었습니다.

1933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54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일컬어 '예수회의 재건자'라고 불렀습니다.

 

15. 4월 12일 성인 요셉 모스카티 (Joseph Mosc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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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셉 모스카티 (4월12일)

신분 : 외사, 과학자 

활동지역 : 나폴리(Napoli)

활동연도 : 1880-1927년

같은이름 : 모스까띠, 모시카띠, 요세푸스, 요제프, 조세푸스, 조세프, 조셉, 조제프, 주세페, 쥬세페, 호세

 

성 요셉 모스카티(Josephus Moscati)는 1880년 7월 25일 이탈리아 베네벤토(Benevento)에서 판사인 아버지 프란치스코와 어머니 로사 사이의 아홉 자녀 중 일곱째로 태어나 6일 만에 유아세례를 받았으며 1884년에 나폴리로 이사하여, 1888년에 첫영성체를 하였습니다.

1897년 나폴리 대학에 들어가 의학을 공부하던 모스카티는 어려서부터 깊은 신앙과 친절한 성품을 지녔는데, 대학 시절에도 학업에 열중하면서 기도에 충실하여 매일미사 참례를 하였습니다. 1903년 우수한 성적으로 학업을 마치고 의사로서 바쁘고 고된 생활을 시작한 그는 정성껏 환자들을 돌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영혼을 돌보는 데에도 깊은 관심을 가짐으로써 교회를 떠나 있던 많은 사람들을 신앙생활로 다시 돌아오게 합니다.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었는데, 이들을 무료로 진료하였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이들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나폴리의 중심가에 자리 잡은 그의 진료소에는 그에게서 진료와 마음을 위안을 받으려는 환자들이 줄을 이었는데 이처럼 과중한 활동 중에도 모스카티는 의학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아 32편의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1911년에는 나폴리 대학의 화학생리학 주임교수로 임명되었고, 또 빈(Wien)과 에든버러(Edinburgh)에서 개최된 국제 생리학 회의에 이탈리아 대표로 참석하기도 하였습니다.

1906년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였을 때는 즉시 피해 지역으로 달려가 위험을 무릅쓰고 인근 병원의 환자들을 옮기는 작업을 거들었으며, 1911년 콜레라가 창궐하였을 때에는 이 전염병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고,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군병원의 책임자로도 활약하였습니다.

1919년 40세도 안된 나이에 불치병 환자들을 위한 병원의 책임자 중 한 사람으로 임명된 모스카티는, 1927년 4월 12일 병원에서의 오전 진료를 마치고 평소와 마찬가지로 오후에 자신의 집에서 환자를 진료하던 중 갑작스러운 발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나폴리 각계각층의 시민들은 달려와 “의사 성인, 쥬세페 모스카티가 죽었다”라고 애도하였으며, 그를 추모하고 그의 전구를 비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제주 누오보(Giesu Nuovo) 성당에 안치된 그의 무덤은 항상 꽃으로 덮였습니다.

그로부터 4년 뒤 모스카티의 뛰어난 덕행과 전구를 통한 기적적 치료에 대한 증거와 증언을 수집하기 위한 교구 차원의 조사가 시작되었고, 성년(聖年)인 1975년 11월에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식이 거행되었고, 1987년 10월 25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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