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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이야기/세례명 이야기

아나스타시아(Anastasia) 축일 2.(5-6) - 5월 29일, 국내

 

 

아나스타시아(Anastasia)

 

5. 5월 29일 복녀 김조이 아나스타시아(金召史 Anastasia)

5월29일-124위복자
5월29일 124위 복자

신분 : 양인, 부인, 순교자

활동지역 : 한국(Korea)

활동연도 : 1789-1839년

같은이름 : 아나스타샤, 아나스따시아, 김아나스타시아, 김 아나스타시아

 

충청도 덕산의 서민 가정에서 태어난 김조이(金召史) 아나스타시아는 장성한 뒤 이성삼 바오로와 혼인하였으며 남편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습니다.

 

원만한 성격을 갖고 있던 김 아나스타시아는 이러한 성격으로 인해 천주교에 입교한 이후에 모든 이에게 사랑받았으며 그녀의 가정은 모두가 열심한 신자였기에 성가정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교리를 실천하는 데 언제나 열심이었던 그녀는 자녀들의 교리 교육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마을 부인들의 교육에까지 유의하여 그들에게 그녀의 권면은 아주 유익하였습니다.

 

김 아나스타시아 부부는 1827년 정해박해 때 박해를 피해 다른 곳으로 이주할 수 있었고 피신한 곳에서 딸 이봉금 아나스타시아를 낳고, 집에 선교사를 모시는 행운을 얻게 되었으며 이들 부부는 이때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고 딸 이 아나스타시아는 첫영성체를 하였습니다. 다시 박해의 위협이 그녀의 가정에 839년 기해박해 때 닥쳐옵니다.

 

김 아나스타시아의 남편은 박해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집에 없었지만 이미 밀고된 상황이었기에 피신을 해야만 했는데 그녀는 잠시 망설였지만 전라도 광주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홍재영 프로타시오의 집으로 곧 딸을 데리고 피신하였지만 같이 있던 교우들과 이곳에서 함께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됩니다.

 

김 아나스타시아는 전주에 도착한 뒤 여러 차례 신문을 당하지만 어떠한 고문과 위협에도 굴하지 않았으며 ‘천주를 배반하고 남편이 있는 곳을 말하라.’는 강요를 계속 거절하였기에 더 혹독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결국 감사 앞으로 끌려가 형벌을 다시 받은 후 옥에 갇히게 되고 그녀의 어린 딸 역시 굳게 신앙을 증언하고 옥으로 끌려오게 됩니다.

 

어느 날 딸 이 아나스타시아가 문초를 받고 옥으로 돌아오자 김 아나스타시아는 딸의 신앙을 의심하는 체하면서 “너는 고문을 당하면 꿋꿋하게 견디어 낼 힘이 없어 틀림없이 배교를 하게 될 거다.” 라고 말하는데 딸은 펄쩍 뛰면서 아니라고 부정하며 어떠한 시련을 당해도 신앙의 가르침에 충실하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김 아나스타시아는 결국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였고 다시 곤장을 맞고 판결이 내려올 때까지 옥중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녀는 참수형을 바랐으나 1839년 10월 경, 그녀의 나이 50세에 형벌의 상처와 옥중 생활에서 얻은 병으로 인해 옥중에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조정에 전라 감사가 올린 김조이 아나스타시아의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김조이는 그 남편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익혔고, 서양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마음을 고칠 줄을 모르니, 참수를 하여도 오히려 죄가 남을 것입니다.”

 

그녀는 2014년 8월 16일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으며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합니다.

 

+ 과부, 또는 나이가 많은 여성을 점잖게 가리키는 이두인 ‘조이召史’는 한자로는 ‘召史’라고 쓰지만, 읽을 때는 ‘조이’라고 읽습니다.

 

6. 5월 29일 복녀 이봉금 아나스타시아

신분 : 양인, 소녀, 순교자

활동지역 : 한국(Korea)

활동연도 : 1827?-1839년

같은이름 : 아나스타샤, 아나스따시아, 이아나스타시아, 이 아나스타시아

 

이봉금 아나스타시아는 1827년 무렵, 당시 정해박해를 피해 피신생활을 하고 있던 이성삼 바오로와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아나스타시아는 일찍부터 어머니에게서 훌륭한 신앙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나이가 어림에도 자신의 본분을 지킬 줄 알았으며 천주를 진심으로 사랑하였습니다. 열 살 무렵에 교리 문답과 아침, 저녁 기도를 배운 그녀는 그 후 선교사를 만나는 행운을 얻게 되었는데 그녀의 나이는 비록 어렸지만 그녀의 마음에 감동하여 선교사는 그녀가 성체를 모시는 것을 허락합니다.

 

그녀의 덕행과 신심아 나날이 커져가던 중 1839년에 기해박해가 일어나 어머니와 함께 홍재영 프로타시오의 집으로 피신하게 된 그녀는 그곳에서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습니다.

 

관장 앞으로 끌려가 신문을 받게 된 그녀는 서양 선교사가 간 곳을 묻는 관장의 물음에 나이가 어려 선교사의 일은 알 수 없다고 대답하였으며 이어 관장이 ‘천주를 배반하고 욕을 하면 살려 주겠다.’고 하자, 그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일곱 살이 되기 전에는 철이 나지 않아서 읽을 줄도 모르고 다른 것도 몰라서 천주님을 제대로 공경하지 못했어요. 그러나 일곱 살 때부터는 천주를 섬겨 왔으니, 오늘 천주님을 배반하고 욕을 하라고 하시어도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천 번 죽어도 그렇게는 못 하겠어요.”

 

이 아나스타시아는 나이가 어리고 얌전하였으므로 포졸들과 옥리들은 동정심을 발휘하여 목숨을 건지라고 간청하였지만 그녀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고 그 이후로도 관장 앞으로 여러 차례 끌려 나가 위협을 당했지만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관장은 그녀에게 고문을 가하도록 하였습니다.

 

결국 어머니가 옥중에서 순교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 이봉금 아나스타시아는 의지할 데조차 없게 되었지만 끝까지 사랑하는 천주 안에서 힘을 얻어 자신의 결심을 지켜 나갔으며 이에 관장은 1839년 12월 5일(음력 10월 30일)에서 6일 밤(음력 11월 1일) 사이 한밤중에 그녀를 옥에서 교수하라고 명하였고 당시 그녀의 나이는 12세를 넘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그녀는 2014년 8월 16일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으며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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