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도(Bernard)
8. 8월 20일 성인 베르나르도
신분 : 수도원장, 교회학자, 신학자
활동지역 : 클레르보(Clairvaux)
활동연도 : 1090-1153년
같은이름 : 버나드, 베르나르두스
복녀 알레타(Aletha, 4월 4일)는 테셸랭 소렐(Tescelin Sorrel)과 몽바르(Montbard) 영주의 딸이며 성 베르나르도는 그녀의 아들로 부르고뉴(Bourgogne) 디종(Dijon) 근교의 가족 성(城)인 퐁텐(Fontaine)에서 일곱 아들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샤티용(Chatillon)으로 가서 공부를 하면서 청운의 꿈을 펼치고 있었으나, 1107년 어머니의 죽음으로 많은 충격을 받아 수도생활을 추구하게 됩니다.
성 베르나르도는 원래 시토회의 설립자 3명 가운데 한 명은 아니었으나 그를 흔히들 시토회의 설립자로 부릅니다. 그는 1112년 4월에 새로운 수도회인 시토회에 입회하였으며 그때 그는 자신의 형제 4명과 함께 친척과 친구들 30명과 함께 모두 베네딕토회 규칙의 엄격한 해석을 따르기 위하여 1098년에 설립된 시토회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들은 원장이던 성 스테파노 하딩(Stephanus Harding, 3월 28일)으로부터 대단한 환영을 받게 됩니다.
성 베르나르도는 1115년에 성 스테파노 하딩의 지시로 부르고뉴와 샹파뉴(Champagne)의 경계지역에 있는 클레르보라는 고립된 계곡에 12명의 수도자와 함께 수도원을 세우기 위해 파견되었는데 그는 여기서 자신의 엄격한 규율로 인해 약간의 어려움에 봉착하지만 그의 높은 성덕으로 곧 수많은 제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때 그 수도원의 이름을 발레 답신트에서 클레르보로 바꾸었으며 당시 68개의 시토회 수도원의 모원으로 만들게 됩니다.
그 후 그는 자신의 학덕과 지덕을 활용하여 수도원의 외부 일을 처리하게 되었고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 중 하나가 되어 통치자와 교황의 자문을 담당하기도 합니다. 성 베르나르도는 대립교황인 아나클레투스 2세의 요구에 대항해 1130년의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Innocentius II) 선출의 합법성을 지지하였으며 로테르 2세를 황제로 인정하도록 롬바르디아(Lombardia)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일 역시 성공적으로 수행하였습니다. 1140년부터는 공적으로 설교하는 일을 시작한 그는 이로 인해 놀라운 명성을 얻습니다.
클레르보 수도원의 수도자였던 에우게니우스 3세(Eugenius III)가 1145년에 교황으로 선출되자, 그는 교황 앞으로 교황직의 의무에 대한 글을 보내어 로마(Roma) 교황청의 남용을 자제하고, 항상 교황이 목전에 두어야 할 종교적 신비에 대해 자세히 성명하였습니다.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던 교황 에우게니우스는 그를 랑그도크(Languedoc)에 파견하여 알비파(Albigenses) 이단을 대항하여 설교하도록 하였고 프랑스와 독일에 제2차 십자군 원정의 열기를 북돋우는 특사로 임명하였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활동들과 함께 심각한 건강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성한 저술가로도 활동하였는데 그의 서한과 "아마(Armagh)의 성 말라키아의 생애" 그리고 "신애론"은 영어로 번역되었으며 자신의 수도자들에게 행한 강론은 "아가"로 묶었습니다. 그는 성서를 자신의 저술과 설교에서 광범위하게 인용하는 이유를 "말씀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박아 주기 위함"이라고 하였는데 그의 저서와 신심은 이 때문에 오늘의 신자들에게도 깊은 감명을 주고 있습니다. 다양한 기질과 믿음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은 그는 '꿀처럼 단 박사'(Doctor Mellifluus)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클레르보에서 그는 1153년 8월 20일 선종하였고 교황 알렉산데르 3세(Alexander III)에 의해 1170년 시성되었고, 1830년에 교황 비오 8세(Pius VIII)는 그를 교회학자로 선포하였습니다. 그는 스콜라 학파 이전의 신학자이며, 때로는 '마지막 교부'로 불리기도 하고 있으며 그의 문장은 꿀벌통이고 양봉업(자)의 수호성인입니다.
9. 8월 21일 성인 베르나르도
10. 8월 22일 복자 베르나르도
신분 : 수사
활동지역 : 오피다(Offida)
활동연도 : 1604-1694년
같은이름 : 버나드, 베르나르두스
베르나르도는 마르카의 아피냐노에서 어느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나 일곱 살 때부터 양치기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도자가 되라는 주님의 부르심을 깨달은 그는 카푸친회의 평수사가 되었고 여러 수도원의 잡일을 맡아하면서 문전걸식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처음에는 인정되지 못하여 관구장의 질책을 받기도 하였지만 그는 일생동안 이런 일을 통하여 높은 성덕의 지위에 올랐던 것입니다. 주민들은 그에게 음식을 들고 와서 영적 지도를 받았으며 수많은 죄인들이 개과천선하였습니다.
한 번은 죽어가는 아이를 어느 가련한 부인이 베르나르두스에게 내보이며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는데 그 아이를 그가 팔에 안았지만 이미 그 아이는 죽어 있었습니다. 그 부인은 그에게 아들을 살려내라고 생떼를 쓰기 시작하였는데 그 아이를 안고 그는 그곳의 성 펠릭스(Felix) 성당으로 가서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선하신 성 펠릭스여, 이제는 당신이 저를 도와줄 시간입니다.” 그 아이는 그 후 소생하였고 수많은 주민들이 이 기적으로 인해 큰 혼잡을 빚었다고 전해집니다. 90세의 일기로 선종한 그는 수도원 문지기로 일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교황 비오 6세(Pius VI)에 의해 1795년 복자품에 올랐으며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서는 그의 축일을 8월 23일에 기념합니다.
11. 10월 14일 성인 베르나르도
신분 : 은수자
활동지역 : 로카 다르체(Rocca d’Arce)
활동연도 : +9세기
같은이름 : 버나드, 베르나르두스
성 베르나르도는 프랑스 또는 영국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예루살렘(Jerusalem) 성지와 로마(Roma) 순례를 마친 후 이탈리아 캄파니아(Campania) 지방의 아르피노(Arpino)에서 은수자로서 살았습니다. 로카 다르체에 그의 유해가 모셔져 있습니다.
12. 12월 4일 성인 베르나르도
신분 : 추기경
활동지역 : 파르마(Parma)
활동연도 : +1133년
같은이름 : 버나드, 베르나르두스
성 베르나르도는 이탈리아 피렌체(Firenze)의 우베르티(Uberti) 가문 출신으로 산 살비오(San Salvio) 수도원의 원장과 베네딕토회 발룸브로사 연합회의 총장을 거쳐서 파르마의 추기경 주교로 교황 우르바누스 2세(Urbanus II)에 의하여 임명되었습니다. 파르마는 그 당시 이교와 이단 때문에 골치를 앓던 도시였는데 그가 이 도시의 주교가 되자마자 교황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 성직매매를 완전히 추방하고 극적으로 타락했던 교구를 소생시켰습니다. 그는 이 과정에서 2년 동안의 유배생활도 감수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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