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Leo)
교황 신분으로 레오 1세, 레오 2세 등이지만 해당 세례명을 사용하는 경우 대부분 그냥 레오라고 사용하는 듯합니다.
11. 11월 10일 레오 1세(대) (Leo I the Great)
신분 : 교황, 교회학자
활동연도 : +461년
아마도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 사람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로마(Roma)에서 산 듯한 성 대 레오 1세는 교황 성 코일레스티누스 1세(Coelestinus I, 7월 27일)와 성 식스투스 3세(Sixtus III, 8월 19일) 및에서 부제로 봉사하였고 440년에는 황제의 요청으로 에지오 장군과 알비누스 집정관 사이에 평화를 이룩하고자 갈리아에 파견되어 노력하였고 그러던 중 교황 성 식스투스 3세를 계승해 교황으로 선출되어 9월 29일 주교품을 받고 착좌하였습니다.
그는 이때부터 황제와 교회 간의 알력을 비롯하여 네스토리우스주의, 마니교도, 펠라기우스주의, 프리실리아누스주의에 강력히 대처하는 등 많은 난관을 무난히 극복하였습니다. 448년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대수도원장인 에우티케스(Eutyches) 일파와 격돌하게 되었는데 그리스도의 두 가지 본성(신성과 인성)을 부인하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플라비아누스 (Flavianus)가 내정한 원장이었던 에우티케스는 동로마제국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의 지원을 받고 있었으며 더욱 극심한 혼란을 초래하였습니다. 보스포루스(Bosphorus) 해협 연안의 도시 칼케돈(Chalcedon)에서 성 레오 교황은 451년 공의회를 소집하여 천주강생의 교리를 분명히 하는 교의 서간을 반포하였습니다.
성 대 레오 교황은 외교 문제에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훈족의 아틸라(Attila) 왕이 군대를 이끌고 451년 이탈리아에 쳐들어 와 로마를 위협하자 교황에게 발렌티누스 3세 황제는 강화 중재를 요청하였고 이에 용감히 나아간 레오 교황은 화평을 얻어내고 아틸라 왕을 돌려보냈습니다. 또한 반달족의 가이세리쿠스(Gaisericus, 또는 Genseric)가 455년 이탈리아에 상륙해 로마로 진격해 왔을 때도 그의 중재를 통하여 방화와 살육으로부터 로마를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에도 선교사를 파견하는 등 교황으로서 놀라운 업적을 남겼으며 교황권을 확립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하였으며 그의 재임 기간은 한마디로 교황권 확립의 시기였습니다. 역사적으로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와 함께 '대'(大)라는 존칭을 받는 교황으로 그는 461년 11월 10일 선종하였고 성 베드로 대성당 회랑에 안치되었다가 교황 성 세르기우스 1세(Sergius I, 9월 8일)에 의해 교황으로서는 최초로 688년 성 베드로 대성당 내부 지하묘지로 옮겨 안장되었습니다.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1754년 교회학자로 선포되었습니다.
12. 7월 3일 성인 레오 2세(Leo II)
신분 : 교황
활동연도 : +683년
성 레오 2세는 시칠리아(Sicilia) 출신으로 교황 성 아가토(Agatho, 1월 10일)를 계승하여 681년에 교황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비록 짧은 재임기간을 보냈지만 그리스도 단의설 이단을 지지하던 지도자들을 단죄하였고 자신이 세운 성당으로 카타콤바로부터 많은 순교자의 유해를 옮겨 공경하여 성인 공경에 대한 선풍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웅변에 능하였고 라틴어와 꼭 같이 그리스어를 구사하는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13. 6월 12일 성인 레오 3세(Leo III)
신분 : 교황
활동연도 : +816년
성 레오 3세는 남부 이탈리아 출신의 로마인으로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교황청에서 어려서부터 일했습니다. 795년 12월 25일 교황 하드리아누스 1세(Hadrianus I)가 선종한 직후 그는 교황으로 선출되었는데 선출 당시 그는 산타 수산나(Santa Susanna) 성당의 추기경 사제였는데 그의 교황 선출에 불만을 품은 무리들로부터 수많은 도전을 받게 됩니다. 그는 성 마르코(Marcus) 축일에는 행렬 도중 반도들에게 피납되어 혀가 잘리는 등 거의 산송장이 될 정도로 고초를 겪었는데 상처가 급속도로 회복되어 이를 모든 이들이 기적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재임 기간 중에 그는 프랑크 왕국의 왕 샤를마뉴(Charlemagne)를 대관하였고 이 결과로 교회 재건과 교황청과 국가들 간의 관계 회복을 성공적으로 성취하였습니다. 20여 년 간 교황으로서 재위했던 그는 1673년에 로마 순교록의 성인 목록에 올랐습니다.
14. 7월 17일 성인 레오 4세 (Leo IV)
신분 : 교황
활동연도 : +855년
성 레오 4세는 롬바르드족 혈통의 로마인으로 성 마르티누스(Martinus)의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라테라노(Laterano) 대성당의 차부제를 거쳐 추기경 사제가 되었습니다. 교황 세르기우스 2세(Sergius II)가 847년 1월 27일 선종하자 그는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는데 사라센족의 침략으로부터 로마를 구하는 것이 그의 첫 임무였습니다. 사라센족은 이미 테베레강까지 쳐들어 와 성 바오로 대성전을 초토화하였으나 로마를 지키기 위해 성채를 보수하고 강화한 성 레오 4세 교황은 849년 사라센족에게 오스티아(Ostia) 해전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주었습니다. 매우 자유롭고 정의로운 사람이었던 그는 겸손하고 인내심이 있었는데 만약 이러한 면모가 그에게 없었더라면 정치적으로 격동기를 거치는 동안 성 레오 4세의 영적 위대성은 잊혀 버렸을 것입니다. 그는 로마 교회 안에 성가를 적극적으로 장려했던 최초의 인물이며 뛰어난 설교가이기도 합니다.
15. 4월 19일 성인 레오 9세 (Leo IX)
신분 : 교황
활동연도 : 1002-1054년
성 레오 9세는 에기스하임(Egisheim, 오늘날의 프랑스 북동부 알자스(Alsace)) 지방 태생으로 황제의 측근인 후고(Hugo) 백작에게 훌륭한 교육을 받아 독일어권에서 살았지만 프랑스어에도 능통하였습니다. 그는 브루노(Bruno)라는 속명으로 불렸고 툴(Toul)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학교에서도 이미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소년 시절에 뱀에 물라게 되어 생사의 기로에 놓이게 되는데 이때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의 환시를 보고 기적적으로 치유되었으며 이러한 경험이 그의 일생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는 1027년 9월 9일 툴(Toul)의 주교로 착좌하여 성직자들의 기강을 바로잡는 일부터 착수하였는데 매우 큰 성공을 거두었고 교황 다마수스 2세(Damasus II)가 1048년 8월 9일 사망했을 때 후계자로 선출되어 레오 9세라는 이름으로 이듬해 2월 12일 교황좌에 올랐습니다. 교회의 고질병이던 성직매매를 금지하기 위하여 그는 로마(Roma) 교회회의를 개최하였고 특히 사제 독신제를 강화시켰으며 남부 이탈리아 지역에 대한 세속권을 받아 교황령을 크게 확장시켰으나 여러 가지 잡음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교황 복자 빅토르 3세(Victor III, 9월 16일)는 1087년 그의 시신을 발굴하여 성 베드로 대성전에 안장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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