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종교 이야기/세례명 이야기

다니엘(Daniel) 축일 2.(7-9) - 7월 21일, 9월 11일, 10월 10일

 

다니엘(Daniel) 

 

7. 7월 21일 성인 다니엘

7월-21일-성-다니엘
성 다니엘(7월 21일)

신분 : 구약인물, 예언자

활동연도 : +연대미상

같은이름 : 대니얼

 

다니엘서는 구약성경에 속한 예언서입니다. 다니엘서를 히브리어 경전은 성문서(聖文書)에 포함해 에스테르기와 에즈라기 사이에 배치하고 있지만 70인역(Septuaginta)이나 그 밖의 그리스어 번역본들에서는 이를 예언서로 취급하여 에제키엘서 다음에 배열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이 순서에 따라 예언서에 다니엘서를 배치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판결하신다’는 뜻의 다니엘은 아이들이 출생할 때 많이 붙여진 이름으로 다니엘서의 기록에 의하면, 유다 임금 여호야킴이 바빌론으로 끌려갈 때 함께 갔다고 전해지는 다니엘은 네부카드네자르, 벨사차르, 다리우스, 키루스 임금 치하에서 궁중의 조언자로, 그리고 포로로 끌려 온 자기 민족을 위한 예언자로서 활동하였습니다. 구약성경이 담고 있는 다니엘에 관한 보도와 다니엘서에 대한 보도들은 역사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일관되지 못하기 때문에 다니엘은 바빌론 유배 시대의 역사적 인물이 아닌 이스라엘의 지혜문학에서 형성된 상징적 인물로 여겨지고 있으나 이 상징적 인물의 기원은 분명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습니다.

 

다니엘서의 저자가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하시드인(Hasidim, ‘경건한 자들’이란 뜻)에 속한 사람 중 한 명으로 보고 있는데 하시드인으로 구성된 유대교 일파가 모습을 드러낸 시기는 마카베오 형제들의 항쟁 이전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들은 율법에 충실했고 이방 민족들의 영향력을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사람들로 처음에는 마카베오 형제들의 항쟁을 지지했으나(1마카 2,42; 2마카 14,6) 이 항쟁이 종교성을 상실한 순수 정치적 실력행사로 판단되자 그 순간 거기에서 이탈하여 그들의 고유 행동노선을 밟아 갔는데 이들의 직접적인 후예가 바리사이들입니다.

 

다니엘서 저자는 그리스화 움직임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고 성실하게 사는 유다인들에게 무조건 율법에 복종할 것을 강요하는 자들도 증오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 셀레우코스 왕들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한 동족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박해에 직면했을 때에도 굽힐 줄 모르는 신앙을 고취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서 9,4-19절과 3,26-45절은 하시드인들의 정신을 잘 반영해 주는 기도문들인데 저자는 그 기도문들에서 이스라엘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선성(善性)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서의 저자는 사후(死後)의 상선벌악과 육신의 부활에 대한 교의를 처음으로 분명하게 표명해 내었는데 이는 그의 최대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다니엘서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바빌론 정부가 자신들의 하수인을 만들기 위해 유다 왕족이나 귀족의 자녀들을 모아 교육할 때 다니엘 역시 어려서부터 그 대상자로 뽑힌 사람 중 하나인데 이에 이름까지 바꾸며 바빌론 문화를 강제로 익혀야 했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동료 하난야, 미사엘, 아자르야는 벨트사차르, 사드락, 메삭, 아벳 느고라는 이름으로 임금의 시종(侍從)으로 발탁되었고,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의 꿈을 정확해 해석해 준 다니엘은 임금의 총애를 받게 됩니다. 이러한 그들에게 첫 시련이 닥치는데 이는 율법에 어긋나는 부정한 음식과 술을 궁중에서 지내면서 강요당한 것이었으나 다니엘은 내시장에게 간청함으로써 이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1장).

 

또한 네부카드네자르가 두라 평야에 금으로 만들어 세운 우상에 절을 해야 한다는 임금의 명령은 최대의 시련이었는데 이 명령을 모두가 따랐지만 다니엘의 세 동료는 결코 하느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길 수 없었기에 결국 고발당하게 되고 임금이 선포한 대로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던져지는데 주님의 천사가 내려와 불가마 속에 있는 그들을 구해주었습니다. 가마 속에서 나와 유유히 걸으며 세 젊은이는 하느님을 찬송하고 영광을 드렸습니다(3장).

 

 

모함을 받아 다니엘도 얼마 후 죽음의 위험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는 다리우스 임금이 아닌 다른 어떤 신이나 사람에게 기도하면 안 된다는 금령을 어기고, 늘 하던 대로 하루 세 번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기도했는데 사람들은 이런 다니엘을 모함해 고발하였고 법이 정한 대로 곧 그는 사자 굴에 던져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다니엘을 아낀 임금은 그를 살리려고 노력했지만 자신이 정한 법을 스스로 어길 수는 없었기에 결국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지게 되지만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사자들의 입을 막아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으며 악의로 그를 고발했던 사람들이 오히려 임금의 명으로 사자 굴에 던져지게 되고 바로 순식간에 갈기갈기 찢겨나가고 말았습니다. 다리우스 임금은 조서를 내려 누구든지 간에 하느님 앞에서 두려워해야 하며 그분을 찬미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렇듯 다리우스의 통치 때와 페르시아의 키루스 통치 때에도 다니엘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6장).

 

수많은 환시를 통해 미래의 일들을 본 다니엘은 예루살렘의 복구와 하느님의 정의가 이루게 될 의인들의 결정적 승리와 부활에 대해 선포하였으며 (7-12장) 수산나를 구한 대표적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욕정에 눈이 먼 두 원로가 아름답고 신앙심 깊은 수산나를 모함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자 수산나의 기도하는 소리를 하느님께서 들으시고 다니엘을 보내주셨는데 그는 슬기로운 판결로 수산나의 무죄를 밝혀내었고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이들을 구원해 주시는 하느님을 찬미하였으며 죄인들에게는 응당한 벌을 주었습니다(13장). 이렇게 다니엘은 하느님에 대한 굳은 믿음으로 희망을 전한 예언자였습니다.

 

8. 9월 11일 성인 다니엘

신분 : 수도원장, 주교

활동지역 : 뱅거(Bangor)

활동연도 : +584년

같은이름 : 대니얼, 데이니올

 

성 다니엘을 뱅거의 다니엘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웨일스(Wales) 지방 스노우도니아(Snowdonia) 지역을 가르는 메나이(Menai) 해협의 동쪽 뱅거 파르(Bangor Fawr)에 수도원을 세웠기 때문인데 당시에 그는 웨일스의 귀네드(Gwynedd) 왕국에 속한 뱅거 교구의 초대 주교가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가정 분위기에서 태어나 성장한 그는 란카판(Llancarfan) 수도원의 성 카독(Cadoc, 1월 24일) 문하에서 공부하였습니다. 체스터(Chester) 전투 때 노섬브리아(Northumbria)의 에텔프리드(Ethelfrid) 왕에 의해 616년 경 그가 설립한 뱅거 수도원의 많은 수도승이 살해되었는데 그 수가 1,200명을 넘었다는 기록을 통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수도원장과 주교로서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며 살다가 584년 선종한 그는 바드시 섬(Bardsey Island)에 안장되었는데 그에 대한 공경은 그 후 웨일즈 북부 지방에서 널리 퍼지게 되었고, 그의 이름으로 많은 성당이 봉헌되었는데 뱅거 수도원 자리에 건립된 주교좌성당 역시 그의 이름으로 봉헌되었습니다. 그는 웨일스에서 보통 데이니올(Deiniol)로도 불리고 있습니다.

 

9. 10월 10일 성인 다니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