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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이야기/세례명 이야기

체칠리아(Cecilia) 축일 2. (2-3) _ 6월 9일, 9월 20일

 

체칠리아(Cecilia)

 

2. 6월 9일 복녀 체칠리아 

복녀-디아나와-체칠리아와-아마타
복녀 디아나와 체칠리아와 아마타

신분 : 동정녀 

활동지역 : 볼로냐(Bologna)

활동연도 : +13세기

같은이름 : 세실리아, 쎄실리아, 카이킬리아, 케킬리아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이탈리아 내의 수도회 활동을 위하여 한적한 곳을 찾았을 때 성 도미니코(Dominicus, 8월 8일)는 볼로냐를 택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가 소망하던 훌륭한 대학을 세울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적당한 곳을 물색하여 수도원을 지었으나 반대가 극심하였는데 그것은 그 땅을 소유하고 있던 안달로가(家)의 위세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안달로의 무남독녀인 디아나(Diana)의 간절한 호소에 굴복하였으며 성 도미니코는 사적으로 그녀의 동정서원을 받아들였고 가능하면 수도생활을 하도록 격려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동안 그녀는 자기 집에 그대로 머물면서 회개 생활을 하였는데 그 후 그녀는 도미니코 수녀회의 수도원을 짓기로 집안사람들을 설득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그녀의 부친은 완강히 거부할 뿐 아니라 그녀가 수녀회에 들어가는 것조차 금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집을 나와서 성 아우구스티누스회에 입회하였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자 온 가족이 몰려와서 강제로 그녀를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집에 온 그녀는 독방에 갇혀 지냈으나 또다시 집을 탈출하여 록사나(Roxana) 수도원으로 들어갑니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작센(Sachsen)의 요르단(Jordan, 2월 13일)이 안달로와 그의 아들들을 설득시켰을 뿐만 아니라, 도미니코 수도원을 짓는데 도움까지 베풀도록 그들의 마음을 누그러트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디아나는 1222년에 로마(Roma)의 성 식스투스(Sixtus) 수녀원에서 온 4명의 수녀들과 함께 볼로냐의 성녀 아녜스(Agnes) 수녀원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하는데 그들 중에 체칠리아(Caecilia)와 아마타(Amata, 2월 20일)가 있었습니다.

이 두 수녀의 생활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디아나와 마찬가지로 높은 성덕으로 유명하였으며 체칠리아는 로마의 귀족가문 출신으로 매우 뛰어난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17세 때 성 마리아(Maria) 수녀원에 들어갔으며 디아나는 1236년 1월 9일에 35세의 일기로 운명하였고, 체칠리아는 설립자 성 도미니코를 오랫동안 도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사망 후에 성녀 아녜스 수녀원에 나란히 안장되었고, 1891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함께 시복되었습니다.

 

 

3. 9월 20일 성인 유 체칠리아 (柳 Cecilia)

유체칠리아(9월20일)
9월20일 유 체칠리아

 

신분 : 과부, 순교자 

활동지역 : 한국

활동연도 : 1761-1839년

같은이름 : 세실리아, 쎄실리아, 유 세실리아, 유 소사, 유 조이, 유세실리아, 유소사, 유조이, 유체칠리아, 카이킬리아, 케킬리아

 

성녀 유 체칠리아(Caecilia)는 서울에서 태어났고, 스무 살 되던 해에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후처로 들어가면서 남편의 권고로 천주교에 입교하여 깊은 신심을 보여주었습니다.

신유년 서울에서 큰 박해가 일어나서 남편이 옥에 갇혔을 때 그녀 역시 세 아이와 함께 붙잡혀 들어갔다가 다행히 풀려 나왔지만 가산은 모두 몰수되어 의지할 곳이 없었습니다. 어려운 처지에 살 길이 막연했던 유 체칠리아는 경기도 광주의 마재에 있는 시동생 정약용 요한의 집에 가서 도움을 청했지만 믿지 않는 친척들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해 무수한 고생을 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맏딸과 전처의 아들인 순교복자 정철상 카롤루스(Carolus)의 아내와 아들마저 죽자 자신이 낳은 정하상 바오로(Paulus)와 정정혜 엘리사벳(Elisabeth)만 남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밤 유 체칠리아는 꿈속에서 남편을 만났는데, “나는 천국에 방 여덟이 있는 집을 하나 지었는데 다섯은 차고 셋만 남았소. 그러니 생활이 어렵더라도 참아 받으시오. 그리고 꼭 우리를 만나러 오도록 하시오.”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과연 가족 여덟 식구 중에서 이미 다섯이 순교하거나 죽었으니 그 꿈은 꼭 들어맞은 셈입니다. 그리고 그 꿈은 그녀의 가슴에 깊은 인상을 박아주어 큰 힘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한편 그녀의 아들인 성 정하상 바오로는 신심 깊은 생활을 하며 선교사들을 조선에 영입하기 위해 여러 해 동안 어머니와 떨어져 살았고 어머니 유 체칠리아에게는 이것이 큰 시련이었는데, 아들이 북경으로 떠날 때마다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아픔을 기도로써 참아 이겨내면서도 가난한 사람을 도왔으니 어떤 때는 그녀가 먹을 것도 먹지 않고 내어주곤 하였습니다. 또 나이가 너무 많아 가사를 돌볼 수 없었기에 거의 모든 시간을 기도와 신앙생활에만 전념하며 지냈다고 합니다.

 

1839년 기해박해가 한창일 때 그녀의 조카 한 사람이 시골에 집까지 장만하여 주며 피신하기를 권했으나, “나는 늘 순교하기를 원하였는데 이제 그 기회가 왔으니 아들 바오로와 함께 순교할 생각이다.” 하며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그해 7월 11일에 아들이 체포되고, 이어서 7월 19일에는 그녀 또한 79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큰 죄를 지은 국사범과 같이 오라로 꽁꽁 묶여 끌려갔는데 그것은 그녀의 집안이 순교자 집안이요, 그녀의 아들이 외국인과 자주 만났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며칠 동안 옥에 갇혀 있던 유 체칠리아는 포장 앞에 나가 신문(訊問)을 당하였는데 처음 다섯 번 문초를 당하는 동안에 태형을 2백30대나 맞았다고 합니다. 기운이 쇠약한 체칠리아였지만 끝까지 참아내며 자세 하나 흐트러트리지 않고 태연자약한 태도를 보여 주어 형리들을 놀라게 했으며 체칠리아는 참수당하기를 바랐으나 나라 법률에 노인에 대한 참수를 금하였기 때문에 재판관들은 때려서 죽이기로 하고 두 번이나 그녀를 불러내어 문초를 거듭하고 위협하며 형벌을 가하였습니다.

체칠리아는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맡기고 모든 고통을 참아냈으며 마침내 기운이 다하여 옥 바닥에 누워 마지막으로 “예수 마리아!” 하고 소리 내어 부르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때가 1839년 11월 23일로 그녀의 나이는 79세였으며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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