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토(Albert)
같은이름 : 알버트, 앨버트, 알베르또, 알베르뚜스, 알베르투스
1. 1월 19일 성인 알베르토
신분 : 주교
활동지역 : 카쉘(Cashel)
활동연도 : +7세기경
영국 사람인 알베르토는 전승에 의하면 아일랜드, 특히 카쉘 근방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였으며 그 도시의 주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성 에르하르두스(Erhardus, 1월 8일)와 함께 바이에른(Bayern)에서 활동하던 그는 예루살렘 성지 순례를 떠났다가 돌아오는 길에 독일의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성 알베르토는 카쉘 교구의 수호성인으로서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2. 4월 5일 성인 알베르토
신분 : 주교
활동지역 : 몬테코르비노(Monte Corvino)
활동연도 : +1127년
성 알베르토는 이탈리아 남부 풀리아(Puglia)의 몬테코르비노 사람으로 주민들에 의하여 그곳의 주교가 공석이었을 때 주교로 선출되었습니다. 그 후로 한때 시력을 상실하여 고생하기도 한 그는 어떤 환시를 보게 된 뒤로 오히려 제2의 시력과 함께 예언의 은혜까지 입었습니다. 한 번은 수하 사람을 데리고 길을 가던 그가 목이 말라 우물의 물을 길어달라고 부탁하였더니 그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고 합니다. 여태껏 성 알베르토처럼 전 시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은 주교는 없었다고 합니다.
3. 5월 7일 복자 알베르토
신분 : 3회원, 순례자
활동지역 : 베르가모(Bergamo)
활동연도 : 1214-1279년
성 알베르토는 이탈리아 북부 베르가모 근방 발레 도냐(Valle d'Ogna)에서 태어난 시골 농부였으며 고향 마을 사람들 중 가장 신심 깊고 모범적인 생활을 했던 그는 도미니코회의 3회원이 되었습니다. 젊은 시절 결혼했지만 아이는 없었고 아내와 친척들의 핀잔을 들으면서도 꾸준히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의 농장을 떠나 순례의 길에 오른 그는 로마(Roma)에 9번, 예루살렘(Jerusalem)에 1번 그리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를 무려 8번이나 찾았습니다. 그는 순례 중에 일을 하면서 얻은 수입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시편을 외우거나 찬미가를 부르면서 순례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크레모나(Cremona)로 이사하였고 그곳에서 수많은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에게서 사람들은 평범한 시골농부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고 감탄하였습니다. 1748년에 그에 대한 공격이 승인되었습니다.
4. 5월 20일 복자 알베르토
신분 : 수도원장
활동지역 : 볼로냐(Bologna)
활동연도 : +1245년
알베르토는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파리시(Parisi) 가문의 일원으로 태어나 고향 마을 인근에 있는 발롬브로사(Vallombrosa) 연합회 수도원에 입회하여 수사가 되었고 그 후 원장이 되었습니다. 알베르트가 사망한 후 그곳은 산 알베르토(San Alberto)로 이름이 변경되었습니다.
5. 8월 7일 성인 알베르토
신분 : 신부, 은수자
활동지역 : 트라파니(Trapani)
활동연도 : +1307년?
성 알베르토는 시칠리아(Sicilia)의 알베르토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이 섬의 트라파니(Trapani) 태생으로 아들이 없던 그의 부모는 만약 아들을 낳게 되면 몬테 카르멜의 성모님께 봉헌하겠다고 약속하였는데 그 후 그가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릴 때부터 카르멜 회원이 되었고 사제로 서품된 후에는 메시나(Messina)로 가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규칙 외에도 자발적인 고행을 많이 하였던 그는 매일 밤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시편 전부를 바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년에는 메시나와 가까운 곳에서 은수생활을 하였고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데 파치(Maria Magdalena de Pazzi, 5월 25일)가 300년 후에 카르멜회를 떠나려는 유혹으로 고생하고 있을 때 천상에 계시는 성 알베르토에게 기도하여 유혹을 이겼다는 이야기도 있을 만큼 그의 성덕은 탁월하였습니다.
6. 9월 17일 성인 알베르토
신분 : 총대주교
활동지역 : 예루살렘(Jerusalem)
활동연도 : +1214년
파르마(Parma)의 저명한 가문에서 태어난 성 알베르토는 신학과 법률을 공부한 후 롬바르디아 지방 모르타라(Mortara)의 성 십자가 수도원에 입회하여 수도자가 되었습니다. 1180년에는 수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1184년에는 보비오(Bobbio)의 주교로, 그리고 몇 년 후 베르첼리의 주교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20년 가까이 이탈리아 베르첼리(Vercelli)의 주교로 재임하였으며 그의 뛰어난 외교적 재능으로 교황 클레멘스 3세(Clemens III)와 프레드리히 바르바로사(Frederick Barbarossa) 황제의 중재자로 선출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1199년에는 북이탈리아의 교황사절로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에 의해 임명되어 파르마(Parma)와 피아첸차(Piacenza) 간의 전쟁을 끝내도록 도왔습니다.
1187년 사라센인들이 예루살렘을 재점령하자 1205년경 위험에 처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는 신자들과 이슬람교 신자 모두에게 존경을 받던 성 알베르토를 예루살렘의 총대주교로 임명하였고 교황특사로서 예루살렘 성지를 돌보도록 하였는데 그는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평화적 공존을 위하여 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성 알베르토는 1209년경 카르멜산의 은수자들을 위해 총대주교로서 규칙서를 만들어 주었는데 이는 성 알베르투스의 카르멜회 규칙으로 불립니다. 카르멜산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특별한 창설자가 없이 은수자들이 모여 살았는데, 가존 은수자들의 삶과 정신을 간단하고 엄격하게 정리하여 그는 첫 회칙을 만들었고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에 의해 1247년 이 규칙을 따르는 이들이 탁발(托鉢) 수도회로 인준받았습니다. 그는 또한 예루살렘 왕국과 키프로스 왕국, 성전 기사단과 실리시아(Cilicia)의 아르메니아 왕국 간의 분쟁을 중재하기도 하였습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로부터 1214년 제4차 라테라노(Laterano) 공의회에 참석하도록 초청받았지만 그는 끝내 참석하지 못하였는데 9월 14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 행렬이 진행될 때 부도덕한 행동으로 인해 책망받고 면직된 성령 병원의 한 책임자가 그에게 앙심을 품어 그를 칼로 찔러 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비록 공식적으로 시성되지는 않았지만 가톨릭교회 안에서 성인으로 공경받고 있으며 전례적으로 그의 축일을 9월 17일에 기념하고 있는데, 지역과 카르멜회에 따라 4월 8일과 9월 14일, 9월 25일에 기념하기도 합니다. 그는 베르첼리의 성 알베르투스로도 불리고 있습니다.
7. 11월 24일 성인 알베르토
신분 : 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 루뱅(Louvain)
활동연도 : 1166-1192년
벨기에 중부 브라반트(Brabant) 지방 루뱅의 백작 고드프리 3세(Godfrey III)와 그의 첫 번째 아내인 림부르크(Limburg)의 마르가리타(Margareta) 사이에서 1166년 두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난 성 알베르토의 형은 브라반트의 백작 앙리 1세(Henry I)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지금은 몽-세살로 불리는 자신의 부친의 성을 주었고 이 성은 현재 베네딕토 수도원으로 유명합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최고의 교육을 받고 성장한 그는 리에주(Liege)의 시의원으로 젊은 나이에 임명되었지만 1187년, 그가 21살이 되던 해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모든 혜택과 지위를 물리치고 기사가 되어 십자군에 가담하였고 성직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리에주의 주교가 사망한 1191년, 부제이던 성 알베르토가 교회법적으로 주교가 될 수 있는 연령인 30세가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주교로 선출되었고 이러한 결과를 대부분은 인정하였지만 일부 세력은 강력한 저항을 하게 됩니다.
리에주의 주교직을 사임한 그는 이 문제를 들고 로마의 코일레스티누스 3세(Coelestinus III) 교황에게 갔고 교황은 1192년 그의 선출이 유효하다고 판단, 그를 추기경에 임명하였습니다. 연이어 사제품과 주교품을 받은 그는 9월 21일 랭스(Reims) 주교좌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11월 24일 자신과 함께 말을 타고 랭스 교외로 나가자는 독일 기사 3명을 만났는데 그들과 함께 도시 밖으로 나가자 그들은 돌변하여 칼을 뽑아 그를 살해하고 도망갔습니다.
곧 그의 죽음은 정치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고, 그의 명성은 더욱 널리 퍼져나가 그는 순교자로서 큰 공경을 받게 되었고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는 1613년 그를 성인품에 올리면서 그가 살해된 날을 축일로 지정하였는데 지역에 따라서는 그의 축일을 11월 21일에 기념하기도 합니다. 1921년 그의 유해가 브뤼셀(Brussels)로 옮겨졌고 그 이전까지는 랭스에 모셔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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