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셀모(Anselm)
같은이름 : 안셀름, 안셀무스, 안쎌모, 안쎌무스
1. 3월 3일 성인 안셀모
신분 : 수도원장
활동지역 : 노난톨라(Nonantola)
활동연도 : +803년
이탈리아를 랑고바르드족(Langobard)의 왕 아이스툴프(Aistulf)가 통치할 때 프리울리(Friuli)의 공작 성 안셀모는 그의 매제로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유능한 군인이었던 성 안셀모 공작은 열렬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성 안셀모는 병원이 딸린 수도원을 모데나(Modena)의 파나노(Fanano)에 최초로 세웠으며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기를 바랐기에 마침내 로마(Roma)로 가서 성 베네딕토회에 입회하였습니다. 모데나 인근 노난톨라에 두 번째로 수도원을 설립한 그는 그곳의 원장이 되었는데 이후에는 천여 명의 수도자를 지도하는 큰 인물로서 봉사하였습니다. 50년 동안이나 수도자로 살던 그는 연만한 나이에 선종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2. 3월 18일 성인 안셀모
신분 : 주교
활동지역 : 루카(Lucca)
활동연도 : 1036-1086년
성 안셀모는 이탈리아 만투아(Mantua) 태생으로 삼촌인 알렉산데르 2세(Alexander II) 교황에 의하여 루카의 주교로 1073년에 임명되었습니다. 즉시 황제의 서임권 논쟁에 적극 가담하였던 안셀모는 헨리 4세 황제가 주는 주교직의 상징 접수를 거부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안셀모는 클루니악 수도원으로 은퇴해야 했고, 그곳에서 베네딕토회 수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Gregorius VII)로부터 소환을 받았으며 엄격한 생활이 결여된 사람들을 조정하는 일을 보았습니다.
카노사(Canossa)로 1079년에 은퇴한 그는 마틸다 백작 부인의 영적 지도자로 지내면서 수도자 개혁운동에 헌신하였고 교황 그레고리오가 평신도 서임권을 둘러싼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그의 투쟁을 적극 지원하여 맹활약하였습니다. 그레고리우스의 사후 그를 빅토르 3세(Victor III)가 교황청 시찰자로 임명하였고 그는 롬바르디아(Lombardia)의 여러 지역을 관리하게 하였습니다. 만투아에서 운명한 그는 성덕과 성서 지식과 해박한 학식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3. 4월 21일 성인 안셀모
신분 : 대주교, 교회학자, 철학자
활동지역 : 캔터베리(Canterbury)
활동연도 : 1033-1109년
이탈리아 북부 아오스타(Aosta)의 한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1033년 겨울에 태어난 성 안셀모는 15살 되던 해에 수도원에 입회하기를 원했지만 부친이 정치가가 되기를 바랐고 그는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어머니가 1056년 사망하자 아버지의 뜻에 따라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Bourgogne) 지방의 유명한 학교와 클뤼니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그러던 중 위대한 스승 란프랑쿠스(Lanfrancus Cantuariensis, 1005~1089년)의 명성을 들은 그는 1059년에 노르망디(Normandie) 지방 베크(Bec)의 그가 원장으로 있는 베네딕토회 수도원 학교에 들어가게 됩니다. 당시 지나치게 논리학을 강조하던 변증론자들을 논쟁으로 물리친 란프랑쿠스 수도원장은 이로 명성을 얻어 훗날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되었습니다. 성 안셀모는 여기서 란프랑쿠스의 제자이자 친구가 되었으며 1060년 아버지마저 사망하자 정식으로 수도회에 입회하여 수도승이 되었습니다. 수도원의 엄격한 수련을 받는 동시에 문법과 논리학 등을 공부한 그는 다양한 학자들의 저서를 섭렵하며 학문에 정진하였습니다.
란프랑쿠스의 후계자로 1067년 수도원 학교의 교장이 된 성 안셀모는 제자인 동료 수도자들을 위하여 많은 작품을 저술하였으며 윤리 교육과 종교 교육에 힘써 베크 수도원 학교를 명문 학교로 발전시킵니다. 1078년 수도원 원장이 된 그의 성덕과 박학다식함에 대한 소문을 들은 많은 젊은이가 베크 수도원으로 몰려들었고 결국 그들을 한 곳에서 교육할 수 없었던 그는 프랑스와 영국 여러 곳에 수도원을 건립하였습니다. 이는 성 안셀모를 프랑스의 경계를 넘어 영국에까지 명성을 떨치게 하였고 란프랑쿠스가 선종한 뒤에 그는 1903년, 영국 왕 윌리엄 2세(William II Rufus)에 의해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성 안셀모는 이때부터 적지 않은 분쟁에 휩싸이게 되는데 성직자를 직접 임명하는 등 교회 직무에 간섭하는 영국 국왕에게 강력히 반발한 그는 교황의 권위를 위해 투쟁하였으며 국왕은 물론 다른 많은 주교로부터 세속화된 성직자들의 개혁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배척을 받게 되었습니다. 국왕 윌리엄 2세와 격렬한 논쟁을 했던 성 안셀모는 결국 영국 성직 서임권 논쟁의 여파로 1097년 영국을 떠나 로마로 망명길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망명 중에도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아 여러 곳을 방문하면서 그는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였고 교황 복자 우르바노 2세(Urbanus II, 7월 29일)의 요청으로 1098년에는 바리(Bari) 공의회에 참석하여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가 성령을 두고 벌인 ‘필리오퀘(filioque) 논쟁’을 조정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영국의 왕 윌리엄 2세가 1100년에 사망하자 그는 영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1102년에 런던의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에서 회의를 개최한 그는 영국 교회에서도 교황 성 그레고리오 7세(Gregorius VII, 5월 25일)가 활발히 추진하였던 교회 개혁을 시행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성직자들의 생활을 쇄신하기 위해 노력한 그는 한편으로는 영국의 노예무역을 극렬히 비난하며 반대 결의안을 도출하였지만 윌리엄 2세의 후계자인 헨리 1세(Henry I)에게 충성 서약을 하지 않아 또다시 그는 1103년에 로마로 두 번째 망명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그 후 한자리에서 영국 왕과 교황과 협상을 벌인 그는 왕에게 충성 서약은 하지만 서임을 받지 않는다는 합의를 끌어낸 후 영국으로 1106년 돌아왔고 영국 국왕으로부터 교회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성직자들의 생활을 수도원 생활에 기초한 방향으로 쇄신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여러 현실적인 문제와 건강의 악화에도 성 안셀모는 학문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당대에 이미 위대한 신학자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는 스콜라학의 체계를 확립해 ‘스콜라학의 아버지’란 칭호를 얻게 하였습니다. 신앙과 이성이 조화를 이룰 수 있으며, 신학에 아리스토텔레스파의 변증법에서 이용하고 있는 이성주의를 성공적으로 도입시킨 첫 번째 인물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존재를 완전한 존재에 대한 인간의 개념에서부터 증명한 “독어록”(獨語錄, Monologion)의 저자이며 이 사상은 후대의 데카르트(Descartes),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헤겔(Hegel)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중세의 강생에 대한 성 안셀모의 “왜 하느님은 사람이 되셨는가?”(Cur Deus Homo)는 신학 논문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대작이며 그의 저서 중에는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De Fide Trinitatis), “진리론”(De Veritate), “동정녀 잉태론”(De Conceptu Virginali), 그리고 400여 통의 편지와 기도 및 묵상에 관한 책들이 많습니다.
1109년 4월 21일 성주간 수요일에 캔터베리에서 선종한 성 안셀모의 유해는 캔터베리 대성당에 안치되었으며 1163년에 그에 대한 시성 절차가 캔터베리의 대주교인 성 토마스 베케트(Thomas Becket, 12월 29일)에 의해 제기되어 1170년 이전에 공식적으로 이루어졌을 수도 있지만 이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의 시성은 1494년 또는 1497년에 교황 알렉산데르 6세(Alexander VI)가 승인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보고 있으며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에 의해 1720년에 교회 학자로 선포된 것은 확실합니다. 그의 영향력은 단테(Dante)의 작품 “신곡”(神曲)의 천국 편에서 단테가 태양권 안에 있는 빛과 힘의 영들 가운데 성 안셀모를 언급할 정도로 매우 컸습니다. 1909년 4월 21일 교황 성 비오 10세(Pius X, 8월 21일) 역시 그의 선종 800주년을 기념해 반포한 회칙 “Communium Rerum”을 통해 성 안셀모의 업적과 저서에 대해 칭송하였습니다.
옛 “로마 순교록”과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모두 그에 대해서 4월 21일 목록에서 전해주었으며 특히 개정 “로마 순교록”은 성 안셀모가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 베크 수도원의 수도자에서 원장이 되었고 신앙의 지성으로 형제 수도자들이 하느님을 찾고 완덕의 길로 나아가도록 가르쳤으며 나중에 캔터베리의 주교가 되어 많은 고통과 유배를 겪으며 교회의 자유를 위해 싸웠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교회 미술에서 주교 복장을 하고 자신의 저서를 들고 있거나 배를 든 모습(교회의 영적 독립을 표현)으로 종종 표현됩니다.
'종교 이야기 > 세례명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론(Aaron) 축일 - 6월 22일, 7월 1일 (0) | 2024.10.26 |
---|---|
아론(Aaron), 율리오(Julius) 축일 - 6월 22일 (0) | 2024.10.24 |
바오로(Paul) 축일 5.(24-34) - 7월 3일, 7월 20일, 7월 25일, 8월 17일, 8월 29일, 9월 25일, 10월 3일, 11월 6일, 12월 15일, 12월 19일, 12월 24일 (0) | 2024.10.20 |
바오로(Paul) 축일 4.(23) - 6월 29일 (0) | 2024.10.18 |
바오로(Paul) 축일 3.(13-22) - 3월 20일, 4월 17일, 4월 19일, 5월 15일, 5월 17일, 5월 28일, 6월 1일, 6월 3일, 6월 20일, 6월 26일 (0) | 2024.10.1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