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종교 이야기/체험 이야기

서창의 안나 할머니의 폐암 완치 체험 이야기 _ 남양성모성지

 

폐암 선고를 받고 3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은 할머니가 폐암을 완치한 이야기입니다.

 

3년 전쯤 개인적으로 굉장히 힘들었을 때 묵주기도로 체험한 이야기를 여기저기 찾아봤었는데 그떄 본 이야기예요.

 

오랫만에 포스팅하려고 다시 찾아보니 그 이후 치유 증언도 하시고 책도 내셨네요.

 

그리고 그 땐 그냥 할머니이신 줄 알았는데 수녀님이셨고 평생 봉사하며 사신 분이셨네요.

 

--------   가톨릭신문 발췌    -------

“할머니, 남양 신부입니다. 잘 지내세요?”“예, 신부님, 잘 지냅니다.”“민들레 국수집에 봉사 다니신다고 하셨는데 아직도 나가세요?”“이제 나이가 80이라 봉사는 못 나가지만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할머니는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사시는 분이다. 2007년 여름, 열이 나고 기침이 나면서 온몸이 저리고 아파 이 병원 저 병원을 다니며 한 달 넘게 치료를 받았는데 낫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큰 병원에 입원해 일주일간 온갖 검사를 했는데, 폐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으셨다. 병원에서는 원자력병원 암 센터에 연락해뒀으니 당장 그곳으로 가서 항암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그런데 할머니는 병원에 가시는 대신 성지로 오셨다. 돌봐줄 가족도 없는데 암 치료를 받는다고 입원을 하게 되면 여러 사람에게 폐를 끼칠까 걱정이 되셨다고 한다.‘남양성지는 성모님의 왕국인데, 내가 죽어도 성모님의 왕국에서 죽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묵주기도 길에서 기도하다가 죽으면 신부님이 장례는 치러주시겠지….’할머니는 살려달라고 기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으려고 성지에 오셨다고 했다. 혼자 사는 사람이니 집에서 죽으면 죽었는지 살았는지 누가 알겠느냐며 성지에서 묵주기도를 하다가 죽으면 그래도 사람들이 알고, 신부님이 장례는 치러주실 거라는 생각에 성지에서 죽으려고 오셨단다.주차장에서 경당까지 올라오는데 몇 번을 쉬어야 할 만큼 힘이 들었지만, 할머니는 매주 목요일과 주일이 되면 성지에 오셨다. 그렇게 죽을 날만 기다리며 성지를 다니는데 ‘왜 안 죽지?’라며 생각해 보니 어느덧 성지에 다닌 지 1년이 지났다고 한다. 그 사이 할머니의 몸은 많이 좋아져 있었다.할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금방 그 자리에서 펄펄 뛰며 낫는 것이 아니라, 성모님이 조금씩 좋아지게 만들어 주셨다”고 한다. 폐암 말기 진단을 받고 아무런 치료도 받지 않고 병원에 가는 대신 성모님 집에서 죽으려고 성지에 왔는데, 성모님께서 치유해 주셨다는 것이다.그리고는 몇 달 후 병원에 안 가고 나았으니 자신을 낫게 해 주신 성모님께 병원비를 드리는 것이 당연하다며 2000만 원이 넘는 돈을 봉헌하셨다“할머니, 아픈 데 없으시지요?”>“예, 신부님. 저 치유 받은 지 벌써 8년이 되었습니다. 아직까지 아프지 않고 잘 지내고 있습니다. 신부님께도 감사합니다. 성모님 성지 만들어주셨잖아요.”

 

-----  이상각 신부(남양성모성지 전담)  가톨릭 신문 2015-04-26 [제2941호, 3면]  ------

 

치유 증언 동영상

남양성지 _ 폐암 치유 증언

할머님은 2007년 6월 2일에 폐암 선고를 받으셨고, 종합병원에 예약까지 되어 있는 상황에서

'그냥 성모님의 집, 성모님의 왕국, 남양 성모성지에 와서 기도하다 죽자. 나는 가족도 없고 혼자 사니까 누가 장례 지내 줄 사람도 없다. 묵주 기도 길에서 기도하다 쓰러져 죽으면 신부님이 장례는 지내 줄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이곳에 와서 기도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치유해 주세요.가 아니라 그냥 성모님 품에서 죽게 해주세요.' 라고 오신 겁니다.

그렇게 2007년부터 10개월 동안 매 주 목요일과 주일에 성지에 오셔서 기도 하셨습니다.

폐암이 진행 된지 오래여서 3개월 밖에 못사신다고 했는데 10개월을 성지에 다니신 겁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어느 날 완전히 치유가 되셨습니다.

어떤 약이나 항암 치료, 방사선 치료도 받으신 일이 없습니다.

2008년 치유가 일어나고 저에게 짧은 편지를 쓰셔서 증언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제가 할머님의 요청대로 바로 증언하시게 하지 않았습니다.

4년이 지난 어느날 연락을 드렸고,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셨고, 그래서 남양성모성지 봉헌 20주년이 되던 2011년에 증언을 부탁 드렸습니다.

여러분이 듣는 증언 내용은 2011년 3월 9일 주일에 할머님께서 하신 이야기입니다.

할머님은 현재 86세이십니다. 폐암 발병은 72세이고, 증언 때가 76세이셨습니다.

ㅡㅡㅡㅡㅡ2020. 6. 15. 월요일. 남양성모성지 이상각 신부.ㅡㅡㅡㅡㅡ

 

 

남양성모성지_묵주기도길
남양성모성지 묵주기도길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여기까지가 그때 본 이야기예요.

그런데 그때는 이분이 어떤 분이신지가 잘 나오지 않았고 그냥 성당에 다니시는 혼자사는 할머니이신데 

폐암 선고를 받으셨고 그 후 묵주기도를 열심히 해서 치유가 됐다 정도로만 알았었는데 

그 이후 인터뷰도 하시고 책도 내고 하셨는데 2,30대에 13년간 수도 생활을 하신 후에 50여년간 봉사하며 사신 할머니이시네요....

 

그 때 이 이야기를 계속 찾아보면서 나도 1년을 열심히 기도하면 이루어질까 했던 기억이 납니다.

수십년을 냉담자로 살다가 그런 기대를 한게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럽네요.

 

다음은 인터뷰 내용 중 일부만 가져와봤어요.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발견 당시에는 심각했습니다. 통증이 너무 심해 인천에 있는 병원에서 검진을 받았습니다.

얼마 살지 못한다는 말과 함께 폐암 진단을 받았고 의사는 서울에 있는 큰 전문병원으로 가 보라고 권유했습니다.

하지만 돈도 없고 병원에 가서 고생을 하는 것 보다 혼자 고통을 받고 떠나고 싶은 마음에 그냥 견디고 있었습니다. 

그때가 2007년이었고 나이가 70세였습니다. 

그렇게 죽음을 준비하며 견디고 있었는데 제가 몸담았던 수녀회의 수녀들이 우연히 제 상황을 알게 됐습니다.

이후 수녀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그룹을 이뤄 저를 방문해 음식도 가져다 주고 정성을 다해 기도를 해줬습니다.

 

그렇게 고통 속에서 3년이 흘렀고 어느 순간 통증이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얼마 못 산다는 진단 후 12년이 지난 지금 저는 살아 있습니다.

제 몸이 완치되었다는 것을 느낍니다.

투병기를 겪으며 한 때 몸무게가 20kg이나 빠졌기 때문에 몸에 힘은 없지만 잘 극복하고 있습니다.

폐암이 낳은 것은 기도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1972년 말 수도회를 나와 건강이 안 좋아 1년 정도 요양을 했습니다. 그리고 1973년 말 당시 조그만 초가집으로 지어진 서울 청담동공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매일 미사를 봉헌하고 있었습니다. 한 달 정도 지나 신부님이 오셔서 혹시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줄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신부님께 “저에게 무슨 느낌이 옵니까?”라고 물었고 신부님께서는 “그럼요”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단 두 마디가 오간 끝에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1974년 부활절에 9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며 교리를 가르치는 일이 너무나 행복했고 사명감도 컸습니다. 하지만 워낙 몸이 허약했기 때문에 청담동공소에서 교리교육을 하던 중 휴식을 가져야 했습니다.

1974년 겨울, 강원도 영월에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신부님들이 있었고 그곳에서 친구가 유치원 선생을 했습니다. 휴식 기간을 가질 겸 그곳으로 갔는데 떠나는 날 신부님이 저를 알아 봤습니다. 강릉 지역에서 본당 수녀로 있을 때의 저를 기억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신부님은 상계동에 친구 신부가 있는데 매우 열악한 곳이라 저에게 그곳으로 가서 도와줄 수 없겠냐는 요청을 했습니다. 고민 끝에 가기로 결정했고 1974년 성탄절을 지내고 상계동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당시 상계동은 이재민, 수재민 등이 모여 8명씩 판자촌을 지어 살고 있었습니다. 불편한 교통과 열악한 환경 때문에 교리교사들은 6개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모두 그만뒀습니다. 상계동에서 15년을 있었습니다.

 

수도회에 들어가기 전부터 가난하게 살며 그리스도를 따르고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잘 몰랐지만 살아가다 보니 제가 추구하고자 하는 정신의 핵심이 담겨 있음을 알았습니다. 수도복이 아닌 평복으로 활동하는 성심수녀회 수녀들과 6년 동안 상계동에서 함께 생활했습니다. 성심수녀회 수녀들이 평복을 입고 활동하는 개방적인 모습과 겸손하고 가난하게 사는 모습들에서 공의회 정신을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잃은 것은 없습니다. 처음부터 제 소유는 아무것도 없었고 수녀원에서도 빈손이었으며,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살아가는 것이 저에겐 너무나 큰 행복이었습니다. 15년 동안 수천 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상계동본당 신자들이 강의를 해달라는 부탁으로 1998년 10년 만에 방문했는데 참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신자들은 저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상계동본당 신자들이 이곳을 찾아오고 전화통화는 수시로 하고 있습니다. 상계동본당 신자들은 저를 위해 매일 기도한다고 합니다. 어려움 속에서 함께 산 사람들의 고마워 하는 마음과 기도는 저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서창의_안나_도서
서창의 안나_기적은 인연을 낳고 인연은 기적을 낳네

 

서창의-안나-약력
서창의 안나 약력


너무나도 중요한 따뜻한 사랑

나는 1936년 12월 9일(음력) 서울 돈암동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열 살 때까지 유소녀기를 보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함께 우리 가족은 경기도 양평의 비레마을로 이주하였다. 나는 그곳에서 시골살이를 익혔다. 양평은 유난히 물이 맑았고, 우거진 숲이 많았다. 그 숲에는 여러 가지 야생화와 산채나물이 지천으로 자랐다.
봄이 오면 남쪽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결에 영근 보리이삭들이 춤을 추었다. 누렇게 익은 보리밭은 물여울처럼 바람에 일렁거렸다. 잘 익은 보리 대궁 사이로 봄바람들이 숨바꼭질을 한다. 소금쟁이, 물방개, 우렁이들이 못가에서 함께 코러스를 한다. 황금빛 보리밭은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리저리 쏠리며 넘어졌다 이내 일어났다. 나는 그 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서울에 두고 온 단짝친구 윤이와 현석이를 떠올렸다. 그 소꿉친구들을 떠올릴 때마다 그리움이 넘쳐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흔히 6·25전쟁으로 불리는 이 전쟁 중인 1951년 1월 4일 중국인민지원군(중공군)의 개입으로 한국정부는 수도 서울에서 철수하였고, 역사는 이를 ‘1.4 후퇴’로 기록하였다. 이 1.4 후퇴 때 우리 가족은 퇴각하는 국군을 따라 피난길에 올랐다. 부모님의 고향인 충청북도 청주에서 피난의 발길을 멈췄고, 그곳에서 우리 가족의 피난살이는 시작되었다. 나의 10대 중반을 보낸 양평 비레마을 생각이 고된 피난살이 틈틈이 떠올라 몹시 그리웠다.

우리 집 앞에는 ‘바가지우물’이 있었다. 두레박을 내리지 않고, 그냥 바가지로 샘물을 뜰 수 있는 우물을 가리켜 바가지우물이라고 불렀다. 그 우물가에 앉아 물동이를 이고 가는 아낙네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혼자 웃기도 하고, 때로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기도 하였다. 삼베적삼 앞섶이 말려 올라간 밑으로는 늘어진 가슴이 그대로 드러났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물동이를 이고 가는 아기엄마도 있었다. 비레마을에서 지내던 재미나고 신기하던 일들을 떠올리는 사이에 피난살이 기간도 길어졌다.

1957년 나는 청주에서 나길모(1926~2020) 주교님이 본당신부일 때 영세를 받았다. 교리를 공부하면서 머릿속에 깊게 새긴 것은 “너희는 가서 세상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었다. 나는 어떻게 하면 그 유훈을 실천할 수 있을까? 나는 많이 고민하였다. 우선 내 부모형제부터 전교(傳敎)하고 나서, 다른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좋은 일을 한다고 해도 내 부모 형제를 먼저 구원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도 없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1959년 3월 26일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정식 수녀의 길을 택한 것이다. 다른 수련자들은 12월에 입회하였는데, 나는 4개월 늦은 이듬해 3월에 혼자 입회하였다.

결국 하느님은 나의 기원을 들어주셨다.

의식주가 모두 제공되는 가운데 수녀에게 주어진 일만 하면 되는 수도원 생활이 내게는 호강스럽게만 여겨졌다. 고민은 쌓이고 깊어졌다. 그럴수록 내 마음속 평화는 점차 쪼그라들었고, 내 몸에도 병이 생겼다. 그 상태는 악화일로였다.

마침내 나는 1973년 수도복을 벗고 세상 속으로 나왔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듯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광야로 나온 셈이다. 15년 동안 서울 상계동 판자촌에서 가장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공부를 깊게 했다거나 명문대학 간판이라도 있었다면 이를 발판으로 삼아 다른 일을 도모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처지에서는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달할 수 있는 그 일이 가장 적합한 방법이었다.

수도복을 벗고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저 나는 내게 주어진 소임을 다하며 살아왔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이 일만 성공하고 죽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소망마저 없었다. 지난 생활을 되돌아보니 쉽게 이루어진 일은 없다. 그러나 평생을 두고 소원하였던 것들은 하느님께서 다 이루어 주셨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내 마음속에만 담아두었던 이야기들을 이제 사람들 앞에 꺼내 놓으려 한다.>보잘것없는 이야기지만 누군가에게 다가가서 작은 씨앗이 되기를 바란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