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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이야기/세례명 이야기

베드로(Peter) 축일 5.(24-28) _ 6월 2일, 6월 7일, 6월 12일, 6월 23일, 7월 4일

 

베드로(Peter)

 

같은이름 :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베드로(Peter)는 2020년 서울대교구에서 조사한 서울대교구 신자의 세례명 중 3번째로 많이 사용하는 세례명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시는 축일은 6월 29일입니다.

 

베드로(Peter) 축일 1. _ 6월 29일, 2월 22일

 

그렇지만 100명이 넘게 있기 때문에 다른 축일을 택하고 싶으신 분은 다른 날을 선택하셔도 괜찮습니다.

 

24. 6월 2일 성인 베드로 

신분 : 구마자, 순교자 

활동연도 : +303년

같은이름 : 페드로, 페드루스, 피터 

 

히에로니무스의 “순교록”에 따르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에 로마에서 활동하던 성 마르첼리누스(Marcellinus)는 뛰어난 사제였고 성 베드로는 구마자(驅魔者)였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개종자를 얻어 그들의 신앙을 돈독히 하는데 온갖 정열을 쏟았지만 개종자 가운데 어느 간수의 아내와 딸 때문에 그들이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고 가시덤불과 찔레가 무성한 실바 니그라(Sylva Nigra, ‘검은 숲’이란 뜻)로 끌려가서 자신들의 무덤을 직접 판 후 참수되었습니다. 이는 순교자의 유해를 아무도 찾을 수 없도록 사람들이 들어오기 힘든 숲에서 그들을 처형하고 묻은 것이었는데 신심 깊은 부인인 루칠라(Lucilla)와 피르미나(Firmina)가 꿈에서 순교자의 시신을 수습하라는 말씀을 듣고 그들의 유해를 기적적으로 발견하여 로마의 라비카나 가도(Via Lavicana)에 있는 앗 두아스 라우로스(Ad Duas Lauros, ‘두 월계수’라는 뜻) 지하 묘지의 성 티부르티우스(Tiburtius) 무덤 근처에 몰래 안장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들이 묻힌 지하 묘소 위에 성당을 세웁니다.

 

히에로니무스의 “순교록”(Martyrologium Hieronymianum)에서 그들의 순교에 대한 기록을 발견한 교황 성 다마수스 1세(Damasus I, 366∼384년 재위)는 그들을 위한 비문을 작성하고 묘비를 세웠고 이 비문의 내용은 나중에 그들의 무덤을 복원하고 미사 경본에 그들의 이름을 넣은 교황 비길리우스(Vigilius, 537~555년 재위)가 작성한 “순교록”(Passio)의 자료로 쓰인 듯합니다.

두 순교자에 대해 전해지는 내용은 거의 없지만, 7세기부터 그들의 무덤은 순례지가 되었으며 로마 미사 경본 성찬기는 지금도 제1 양식에서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묻힌 지하 묘소에서 19세기 말에 그들이 포함된 프레스코화가 발견되었는데, 사도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Paulus) 사이의 그리스도 아래 어린양 옆에서 한 손을 들어 어린양을 가리키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25. 6월 7일 성인 베드로 

신분 : 신부, 순교자 

활동지역 : 코르도바(Cordoba)

활동연도 : +851년

같은이름 :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성 베드로 신부와 성 발라본수스(Wallabonsus) 부제, 성 조일루스 수도원의 성 사비니아누스(Sabinianus)와 성 비스트레문두스(Wistremundus) 수도승, 성 크리스토포루스 수도원의 성 하벤티우스(Habentius) 수도승, 그리고 코르도바 인근 타바노스(Tabanos)에 수도원을 설립한 고령의 성 예레미야(Jeremias) 수도승은 에스파냐 남부 코르도바에서 이슬람을 반대하는 설교를 하다가 체포되어 순교의 월계관을 썼습니다.

이슬람교도인 무어인들이 코르도바를 수도로 삼은 후기 우마이야(Umayyads) 왕조의 압드 알 라흐만 2세(Abd ar-Rahman II, 822~852년 재위) 왕의 통치 중에 모두 순교한 그들은 죽을 때까지 채찍을 맞고 순교한 고령의 성 예레미야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습니다.

 

 

26. 6월 12일 성인 베드로 

6월12일-성-베드로
성 베드로 (6월 12일)

신분 : 은수자 

활동연도 : +8세기경?

같은이름 :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마케도니아의 아토스산에 수도원들이 세워지기 훨씬 전에 베드로라고 부르는 사람이 산 정상에서 은수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성 베드로는 이 지역 최초의 그리스도인 은수자로 기록되었지만, 그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습니다.

어느 사냥꾼에게 발견된 그의 유해는 성 클레멘스(Clemens) 수도원 성당에 안장되었는데, 성화상 파괴가 자행되는 중에 사라졌다가 이후 포토카미(Fotokami)의 트라키아 사람들 마을로 옮겨져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테살로니카(Thessalonica) 대주교인 성 그레고리우스 팔라마스(Gregorius Palamas, 11월 14일)에 의하면, 청년 시절 한때 군인으로서 사라센인들과의 전투 중에 포로가 되어 감옥에 갇힌 적이 있었던 성 베드로는 이때 미라의 성 니콜라우스(Nicolaus, 12월 6일)와 성 시메온(Simeon, 10월 8일)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풀려납니다. 그 길로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할 결심을 한 그는 사도 성 베드로(Petrus)의 무덤이 있는 로마에 가서 교황을 알현하고 직접 수도복을 받았습니다.

그 후 아시아를 향해 가던 중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동정 마리아의 환시를 보게 되는데 환시 중에 성모님은 그에게 아토스산에서 은수자로 살도록 인도해주었다고 합니다.

성 베드로는 아토스산으로 가서 거의 50여 년을 은수자로 지냈고 은수생활을 하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항상 1년 뒤에 다시 와서 그때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으면 허락하겠다고 말했는데 이는 은수생활의 어려움을 깊이 체험한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전해집니다.

 

27. 6월 23일 성인 베드로 

신분 : 수사

활동지역 : 쥴리 (Juilly)

활동연도 : +1136년

같은이름 :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좋은 가문 출신이었던 성 베드로는 잉글랜드(England) 사람이지만 샹파뉴의 쥴리에서 지냈는데 그는 고향에서 신학을 공부하다 양친을 잃은 뒤에 프랑스로 건너와 파리(Paris)에서 계속 공부하였고 그러다가 같은 영국인인 성 스테파누스 하딩(Stephanus Harding)과 친구의 정을 맺게 됩니다. 

 

이 두 사람은 하느님께 자신들을 봉헌하기로 작정하고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로마(Roma)를 순례하였는데 돌아오는 길에 부르고뉴(Bourgogne)를 지나다가 그곳의 시토 수도원이 지극히 엄격하고 또 단순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보고 몰레스메의 시토 수도원에 정착합니다. 스테파누스는 만족하였으나 베드로는 갈등을 느꼈는지 잠시 다른 곳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수도복을 받았고 그 후 성녀 훔벨리나(Humbelina)의 공동체를 지도하였습니다.

 

28. 7월 4일 복자 베드로 

신분 : 추기경

활동지역 : 룩셈부르크(Luxemburg)

활동연도 : 1369-1387년

같은이름 :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로렌(Lorraine)의 리니(Ligny)에서 룩셈부르크 백작 가문의 아들로 태어난 베드로는 4살 때에 양친을 잃었으며 불과 10세의 나이로 파리(Paris)에서 공부했고 그 후 노트르담(Notre-Dame)에서 성직자가 되었습니다.

1380년부터 1381년까지는 그의 큰 형에 대한 몸값으로 칼네스에서 포로생활을 하기도 하였는데 이를 통하여 겸손과 덕행에 현저한 진보를 보였고 또 인생의 대전환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1384년에 메스(Metz)의 주교가 되었고, 또 2년 뒤에는 벨라브로(Velabro)의 산 조르조(San Giorgio)의 추기경이 되었습니다.

그의 높은 성덕을 대변하는 것은 

"세상을 경시하고 너 자신을 경시하라. 그때 자신의 경멸에서 기쁨을 찾아라. 그러나 다른 사람을 경멸해서는 안 된다."

라는 그의 말 한마디입니다.

1527년 교황 클레멘스 7세(Clemens VII)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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