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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이야기/세례명 이야기

마태오(Matthew) 축일1.(1-4) - 2월 3일, 3월 27일, 9월 21일, 11월 12일

 

마태오(Matthew)

같은이름 : 매튜, 마두, 마테오, 마테우스, 마태우스

 

마태오는 영어 이름 매튜로 우리에게도 꽤 친숙한 이름이기도 합니다.

 

1. 2월 3일 복자 마태오

신분 : 주교

활동지역 : 지르젠티(Girgenti)

활동연도 : +1450년

 

마태오는 시칠리아(Sicilia)의 지르젠티(오늘날의 아그리젠토, Agrigento) 태생으로 일찍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콘벤투알 프란치스코회에 18세 때에 입회하였는데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시에나(Siena)의 성 베르나르두스(Bernardus, 5월 20일)의 명성을 듣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그는 콘벤투알회를 떠나 그와 절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성 베르나르두스와 함께 이탈리아 전역을 다니면서 설교한 그는 특히 성직매매가 극성을 부리고 성직자의 규율이 극히 해이하였던 시칠리아의 성직자들에게 개심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데 성공하였도 이 때문에 교황에게 지르젠티 주민들은 그가 주교로서 봉직해 줄 것을 바라고 호소하여 동의를 받게 됩니다. 그는 첫 번째로 수행한 일은 성직매매를 금지하고 규율 이완을 막는 것이었는데 그 때문에 수많은 적을 만들어 평화를 깨트리고 불화를 조성한다는 누명으로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세운 수도원으로 갔지만 그 수도원의 원장조차 그를 배척하였고 하는 수 없이 팔레르모(Palermo)에 있는 콘벤투알 프란치스코회의 옛 친구로부터 피신처를 얻어 지내다가 선종하였습니다. 1767년 그에 대한 공경이 승인되었습니다.

 

2. 3월 27일 성인 마태오

신분 : 순교자

활동지역 : 보베(Beauvais)

활동연도 : +1098년

 

성 마태오는 프랑스의 보베에서 태어나 교황 복자 우르바누스 2세(Urbanus II, 7월 29일)의 호소로 이슬람의 지배로부터 예루살렘 성지를 회복하기 위해 시작된 제1차 십자군 원정에 보베의 로제루스(Rogerus) 주교의 휘하로 참가하였습니다. 그러나 원정 중에 사라센인들에게 붙잡힌 그는 감옥에 갇혔다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포기하라는 요구를 거부하였고 이로 인해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습니다.

 

3. 9월 21일 성인 마태오

9월21일이-축일인-마태오
성 마태오(9월 21일)

신분 : 사도, 복음사가, 순교자

활동연도 : +1세기경

 

성 마태오는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로 원래는 로마 제국을 위해 이스라엘 북부 갈릴래아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Capharnaum)에서 세금을 걷는 세리였으나, “나를 따라라.” 하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당시 로마 제국을 대신해서 동족에게 세금을 걷던 세리는 멸시의 대상이자 죄인으로 취급받았는데 세관에 앉아 있던 그는 어느 날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마티야’의 유래인 마태오처럼 주님의 부르심 속에서 자비를 체험하고 열두 사도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마르코 복음에 의하면 그는 알패오의 아들로 원래 이름은 레위였으며(2,14) 갈릴래아 태생인 듯한데 마시몬에게 베드로(Petrus)라는 이름을 주신 것처럼, 예수님으로부터 레위 역시 마태오라는 새 이름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은 레위라는 세리가 부르심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며(5,27). 마태오와 레위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복음서마다 조금씩 다르게 언급되면서 몇몇 주장이 있었으나 교회 전통은 대체로 둘을 동일 인물로 보아 왔습니다. 성 마태오는 ‘예수님의 고을’(마태 9,1)로 불리는 카파르나움과 그 인근에서 세관원으로 일하였으며 예수님에 관해 이미 많은 소문을 들었고 제자로 불리기 전에 어쩌면 예수님을 먼저 뵐 기회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성 마태오는 열두 사도 중의 한 명으로 초대 교회부터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로 알려져 왔습니다. 그는 그는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특별히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로 복음서를 저술했다고 하며 교회사가 에우세비우스(Eusebius)의 “교회사”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성 마태오는 12년 동안 먼저 동족인 히브리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고 이후 다른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s)는 성 마태오가 은수자로서 채식만 하면서 생활했다고 주장했으며 전승마다 차이는 있지만, 성 마태오 사도는 유대 지방을 순회하다가 에티오피아로(옛 “로마 순교록”에 따르면), 페르시아까지 가서(“예로니모 순교록”에 따르면)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전승에 따라 순교 장소가 에티오피아와 페르시아로 알려진 것처럼 순교 방법 또한 돌에 맞아 순교하거나 칼에 찔리거나 화형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옛 “로마 순교록”은 에티오피아에서 순교한 성 마태오가 그곳에 묻혔다가 기적적으로 사도 성 바르나바(Barnabas)의 유해와 함께 5세기 제노(Zeno) 황제 때에 발견되었다고 기록하였고 그 후 전승에 따르면 성 마태오의 유해는 이탈리아에 모셔졌다가 10세 중엽 다시 발견되어 이탈리아 남부 항구도시인 살레르노(Salerno)로 옮겨져서 대성당 지하에 안치되어 공경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반면에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세리의 직분이던 레위라고 불리던 성 마태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응답하여 세리의 직분을 떠나 사도이자 복음사가로서 복음서를 썼다고 같은 날 목록에서 소개하며, 그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성경의 모든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선포했다고 적었지만 전승에 따라 다르게 전해지는 순교 장소에 관한 언급은 하지 않았습니다.

 

성 마태오는 교회 미술에서 성경(에제 1,10; 묵시 4,7)에 언급된 ‘살아있는 네 생물’에서 유래한 상징에 의하면 날개 달린 사람, 즉 천사의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복음서를 시작하면서 성 마태오가 구세주의 인간성을 강조한 것에 착안해 네 생물과 복음서를 일치시킨 성 이레네우스(Irenaeus, 6월 28일 : 리옹의 주교이자 교부인)의 선택이었습니다. 세리였던 경력으로 인해 사도 성 마태오 복음사가는 특별히 은행원과 장부 기장자, 세무직원들과 회계사의 수호성인이 되었으며 교회 미술에서도 장부를 펼쳐 들고 있는 모습으로 많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의 축일을 동방 교회에서는 11월 16일에 기념하고 있습니다.

 

4. 11월 12일 성인 마태오

신분 : 수도승, 순교자

활동지역 : 폴란드(Poland)

활동연도 : +1005년

 

쿠에르푸르트(Querfurt)의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 6월 19일)의 친구인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는 라벤나(Ravenna) 수도원에서 성 로무알두스(Romualdus, 6월 19일)의 지도를 받으며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성 아달베르투스(Adalbertus, 4월 23일)에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오토 3세가 포모제(Pomorze, 또는 포메라니아)의 슬라브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요청했을 때, 그를 성 베네딕투스와 다른 수도자들이 따라나섰습니다.

 

볼레슬라우스(Boleslaus) 공작의 궁에서 우선 슬라브어를 배우면서 그들은 그니에즈노(Gniezno) 교외 카지미에르스에 거처를 정하고 활동하였는데 그러던 중 성 베네딕투스와 그의 동료인 성 마태오(Matthaeus), 성 이사악(Isaac), 성 요한(Joannes), 성 크리스티누스(Christinus) 모두 이교인 강도들의 침략으로 살해됩니다. 순교자로서 널리 알려져 있는 그들은 폴란드인은 아니지만 폴란드에서는 ‘다섯 명의 폴란드 수도자’로서 지금도 공경을 받고 있으며 교황 율리우스 2세(Julius 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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