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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이야기/세례명 이야기

마르첼리노(Marcellinus) 축일 2.(7-11)_ 6월 5일, 7월 14일, 8월 27일, 6월 6일, 5월 29일

 

마르첼리노(Marcellinus)

 

7. 6월 5일 성인 마르첼리노

신분 : 순교자

활동연도 : +250년

같은이름 : 마르셀리노, 마르셀리누스, 마르첼리누스

 

성 마르첼리노와 성 파우스티누스(Faustinus)는 성 플로렌티우스(Florentius), 성 율리아누스(Julianus), 성 키리아쿠스(Cyriacus)와 함께 이탈리아의 페루자(Perugia)에서 데키우스 황제 때에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습니다.

 

8. 7월 14일 성인 마르첼리노

신분 : 선교사

활동연도 : +762년경

같은이름 : 마르셀리노, 마르셀리누스, 마르첼리누스, 마르첼모, 마르첼름, 마르쿨프

 

성 마르첼리노는 프리슬란트(Friesland)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성 빌리브로르드(Willibrord)를 따라 네덜란드로 갔던 영국인으로 마르첼모(Marchelm), 마르쿨프(Marculf) 등의 이름으로도 불리고 있습니다. 위트레흐트(Utrecht)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와 합류한 그는 15년 간 프리슬란트와 구엘더랜드에서 활동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성 그레고리우스가 순교하자 그의 관할 구역이 성 레부인(Lebuin)의 수하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는 그 성인의 명에 따라 오브리셀의 이방인들에게 가서 활동하였고 그곳에서 운명하였습니다. 그의 유해는 나중에 데벤터로 이장되었습니다.

 

9. 8월 27일 성인 마르첼리노

신분 : 호민관, 순교자

활동지역 : 토미(Tomi)

활동연도 : +303년

같은이름 : 마르셀리노, 마르셀리누스, 마르첼리누스

 

황제의 칙령을 어기고 그리스도를 섬기는 그리스도교 신자 17명이 이집트인 테바이드 앞에 끌려왔는데, 그들 가운데는 호민관 성 마르첼리노와 그의 아내인 성녀 만네아(Mannea), 그들의 세 아들인 성 요한(Joannes), 세라피온(Serapion), 베드로(Petrus)와 한 명의 주교와 3명의 성직자, 그리고 8명의 다른 평신도들이 있었습니다.

 

“기록을 보니 폰티우스 필라투스(Pontius Pilatus, 또는 본시오 빌라도)의 명에 따라 죽고 묻힌 사람을 예배하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느냐?"라고 관리가 힐문하였지만 신자들은 끝까지 인내하였고 모두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며 마르첼리노 일행은 흑해 근방의 토미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해집니다.

 

10. 6월 6일 성인 마르첼리노 샴파냐 (Marcellinus Champagnat)

성 마르첼리노 샴파냐(6월 6일)

신분 : 신부, 설립자

활동연도 : 1789-1840년

같은이름 : 마르셀리노, 마르셀리누스, 마르첼리누스, 마르슬랭, 베누아, 조제프

 

가난한 물방앗간 집의 아홉 번째 자녀로 프랑스 리옹(Lyon)의 아모 뒤 로제(Hameau du Rosey)에서 1789년 5월 20일 태어난 성 마르첼리노 샴파냐는 신심이 깊은 부모로부터 어려서부터 신앙 교육을 받아 일찍부터 성소의 꿈을 키웠고 리옹 신학교에서 수학한 후 1816년 7월 22일 사제품을 받고 라 발라(La Valla) 본당의 보좌신부로 부임하였습니다. 신학교 생활 이후 늘 소년들을 교육하는 수도회의 설립에 관심을 가져오던 그는 1817년 ‘마리아의 작은 형제회’(마리스타 교육 수사회)를 설립하고 1836년 교황청의 정식 인가를 받았습니다. 마리스타의 교육 이념인 학교 지침을 발간하는 등 교육 분야에서 기여하다가 노트르담 에르미타주에서 1840년 6월 6일 51세를 일기로 선종하였습니다.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1955년 복자품에 올랐고, 로마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1999년 4월 18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마르슬랭 조제프 베누아 샴파냐(Marcellin Joseph Benoit Champagnat)로도 불립니다.

 

 

11. 5월 29일 복자 최창주 마르첼리노 (崔昌周 Marcellinus)

신분 : 양반, 순교자

활동지역 : 한국(Korea)

활동연도 : 1749-1801년

같은이름 : 최 마르첼리노, 최마르첼리노, 마르셀리노, 마르셀리누스, 마르첼리누스

 

경기도 여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최창주(崔昌周) 마르첼리노는 40대 초반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으며 이후 온 가족을 입교시키는 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으나, 1791년의 신해박해 때 체포되고 광주로 압송되었다가 배교하고 석방되었습니다.

 

이후 자신이 지은 죄를 깊게 뉘우친 그는 순교의 은총을 입어 죄를 씻어내고자 노력하였는데 가족과 이웃 교우들을 힘써 권면하였고 두 딸을 모두 교우에게 출가시켰습니다. 하나는 여주에서 1801년 순교한 원경도 요한의 아내이고, 하나는 전주에서 1839년 순교한 신태보 베드로의 며느리이며 1840년 전주에서 순교한 최조이 바르바라입니다.

 

1800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 여주 지방에서 다시 박해가 일어났는데 이때 최 마르첼리노의 아내는 사위인 원 요한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피신할 것을 간청하였고 그의 어머니 또한 피신을 종용하였기에 한양으로 피신하려고 길을 나섰으나 집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순교를 다짐했던 이전의 마음을 되찾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그날 밤에 체포되었으며 여주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최 마르첼리노에게 형벌을 가하면서 관장은 알고 있는 천주교 신자를 밀고하도록 강요하였으나 그는 “천주교에서는 누구에게라도 해를 끼치는 것을 금하고 있으니, 한 사람도 고발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고 밀고를 거부하였고 이에 다시 원 요한과 이 마르티노 등과 옥으로 끌려가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의 옥중 생활은 6개월간 계속되었고 10월에는 경기 감영으로 끌려가 다시 형벌을 받았으나 그의 신앙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시작되자 옥에 갇혀 있는 신자들을 다시 끌어낸 감사는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하였는데 최 마르첼리노는 이때 신자들을 대표하여"모든 사람들의 임금이시며 아버지이신 참 천주를 알고, 그분을 섬기는 행복을 받았으니, 저희는 그분을 배반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형벌은 점점 더 가혹해져 갔지만 동료들과 함께 온갖 유혹을 뿌리치고 서로를 권면하였던 최 마르첼리노와 그들의 동료를 보고 그들을 어찌할 수 없음을 안 감사는 최후 진술을 받아 조정에 보고하였고 조정에서는 ‘고향으로 돌려보내 처형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라.’는 판결을 내립니다. 최 마르첼리노와 그의 동료들은 이에 따라 여주로 압송되어 1801년 4월 25일(음력 3월 13일), 그의 나이 52세에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습니다.

 

조정에 감사가 보고한 최창주 마르첼리노의 최후 진술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최창주는 (천주라는 큰 부모가 있다 하여) 제 아버지를 진정한 아버지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아버지의 이름을 잊어버렸다고 말할 정도로 아주 흉악합니다. 또 모진 형벌을 당하면서도 교회 서적이 있는 곳을 대지 않았고, 끝내 (천주교 신앙을 믿는) 마음을 고칠 수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인륜과 도덕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주 달가운 마음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겠다고 하였습니다.”

 

최창주 마르첼리노는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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